우리가 가진, 되고자 하고 찬미코자 하는 나르시즘적 이상, 소위 이것을 우리는 환상아(幻想我)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실은 많은 제약때문에 현실아(現實我)라는 적응적 대상을 만든다. 이는 인간 갈등의 근본적 원인으로 충돌한다.
환상아는 쉽게 타자와 혼동된다. 타인을 환상아와 동일시하고 대상에 나르시즘을 투영하는 것이다.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는 단테,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연애와 같은 헌신적, 동경적 형태의 연애는 이 범주에 든다.
대상자가 환상아와 동일시되면 내부에서 대립하던 환상아와 현실아중 환상아가 대상으로 투영되면서, 가까이하기 어렵도록 거룩한 존재로 이상화된 애인과, 그(녀)에로의 사랑을 동경하면서도 사랑받기에는 너무도 무가치한 자신을 대비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녀)는 유일무이하며, 지고지순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그 가치는 무한하며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아깝지 않다. 이로써 파생되는 사랑은 일체의 현실적 고려를 초월한 무조건적인,무한의 애정이다. (물론 환상의 차원에서)
그러나 내적 갈등의 해결법으로써 종종 이용되는 이 같은 종류의 연애는, 지극히 위태로운 면도날 위의 균형이며 여리고 무너지기 쉽다. 애인이 떠나가 버려도, 너무 가까이 다가와도, 이런 연애는 파탄나고 만다. 애인(환상아)에게 거부받은 현실아는 절망과 열등감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반대로 애인이 접근해와도 현실차원의 동일시는 불가능해지고 그(녀)의 환상이 깨지며 자신의 현실아와 현실적으로 마찰하면서 갈등이 폭발한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환상아를 투영하는 경우 자식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자식은 부모의 환상아에 어떻게든 부합하기 위해 무리한 노력을 강요당한다. 그 결과로 자기소외가 일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경증, 쇄약증, 편집증적 증세가 나타나 부적응자가 되거나 범죄행태를 보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면 어떤 추상적 존재에 환상아를 투영하는 것이 좋다. 알라, 예수, 토속신앙의 신들은 매우 좋은 발명품이다. 어떤 주의, 체제, 이상이어도 좋다. 이데올로기의 역사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환상아의 집단적 투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앞서 연애의 경우에서처럼 실현되는 것이어서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환상아와 동일시된 이념에 나르시도가 전면적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현실아의 소멸, 즉 자신의 죽음-은 아무런 공포의 대상도 아니다. 만세일계를 외치며 군함에 돌진하는 카마가제 특공대는 지극한 명예를 느낄 것이고, 그리스도교의 순교자는 환희로 몸을 떨며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 듯이 그 신봉자들에 미치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의 투영대상은 이념이나 인물뿐만 아니라 사업, 학문, 예술적 업적, 모험 등도 포함된다. 본디 철인3종 경기라던가, 마라톤, 히말라야 대등정, 공부나 예술을 통한 입신 등 일상의 범주를 넘는 성과에서 환상아의 실현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다. 미디어 시대에 맞추어 TV나 인터넷에서 환상아의 대표선수인 온갖 수퍼맨과 원더우먼이 등장하며 현실원칙을 대변하는 악인(현실아)을 징벌하고 있는 이야기가 수십년간 실증낼 줄도 모르고 되풀이되는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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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뱅이의 정신분석1..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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