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30일 목요일

一切皆苦... 삶 자체가 고통....

일체개고(一切皆苦)..  삶... 그 자체가 고통과 번뇌이다.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고통에도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을 제거한다면 고통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그에 앞서 고(苦)의 반대는 무었일까? 생사고락, 고진감래, 등의 단어를 듣는다면 고통의 반대는 즐거움, 행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짦음이 있음으로 긴것이 있고, 빛이 있어 어둠이 존재하듯이 고통이 있음으로 해서 행복이 존재한다. 즉, 둘은 실은 같은 것으로 하나가 사라지면 나머지도 같이 없어지게 된다. 그런면에서 즐거움(樂)은 일종의 고통이다. 크나큰 낙이 있음으로 해서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부르게된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로 인한 고통, 부모님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 여행에서 돌아온 후의 향수, 나이트에서 즐긴 이후의 공허함, 이는 모두 같은 것이며 근본적인 고통을 또다시 부른다.

본디 인도 산스크리트어 원어를 보면 苦는 Dukha이며 그반대말은 `마음의 평화`(santiam)으로써 고요하고 편안하다는 말이며 이것이 니르바나이다.

어째서 행복이나 즐거움은 고통의 반대가 되지 않을 것인가? 실은 고통이라는 것은 육체에서 나오는 아픔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삶으로 인해 생길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우주적 명제이다.

고통을 없애기위해 고민하던 싯달타는 스승을 찾아 고행을 행했다. 당시 인도에는 금욕주의, 고행, 자기학대 등의 수행방법이 횡횡했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원론적 분열(dualistic split)을 전제하고 있다. 즉,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있으며 고통의 원인을 육신으로 보아 육신에 고통을 줌으로써 정신이 이를 벗어나도록 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싯달타 또한 이러한 수행법을 따랐다. 그러나...

수많은 육체적 고행으로도 시탈타는 만족할 수 없었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다. 육체안에 있는 고정된 아트만으로서의 진정한 자신이란 있는가? 아니 오히려 그런 생각으로 인해 삶의 고통이 가중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시탈타는 이들이 추구하는 아트만의 해방은 고통의 근본적 치유법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보리수 아래에서 사색에 잠긴다.

(사람들은 보리수아래에서의 부처의 명상을 `고행`이라고 생각하며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깨달음을 얻기위한 그시대 그지방에 일반적인 방편일 뿐이었으며 고행 그자체는 수단일 뿐,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명상의 끝에 시탈타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깨달음을 말로 하기는 어려우나 그는 최대한 쉽게 우리에게 그 가리침을 전해주고 있다.


그것을 하나로 압축하면 이는 연기(緣起)라고 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에`pratityasamutpada`로 이는 Paticca(의존하여)+sam(같이)+uppada(일어난다)는 뜻으로 우주적인 이벤트가 서로 연관적으로 dependant하게 일어난다는 의미다.

내가 있음으로 너가있고 너가 있음으로 내가 있어 하나가 사라지면 나머지 하나 또한 같이 사라진다. `왜(why)`라는 질문으로 들어간 궁극에 있어서의 인간 고통의 근원은 이러한 연기론과 맞닿아있다.
이러한 연기론에 의한 우주관으로 세상을 이해하면 상대론적 세계관이 우주의 근본적 본질일 수 있음을 알게된다.

서로 반대되는 상중에 하나가 사라지면 쌍소멸하듯이,`무(無)=진공`에서 쌍생성과 쌍소멸이 생겨나듯이, 이 우주가 우연한 이유로, 혹은 우리가 모르는 어떤 물리적 제 5의 힘에 의해 생겨났듯이, 서로 연관없는 물질은 그 자체로서 `무(無)`와 동의어이다.

끊임없이 물질대사하는 우리 육체,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는 나의 모습, 번민과 고민으로 점철된 우리 스트레스의 근원에 자리잡은 `애愛`, `욕(desire)`, 무지(無知)로부터 파생되는 삶의 고통에 대한 근원적 고통,... 우리는 스스로로써의 나이고 또한 우주속의 모든 것과 연관되어있다.

무릇 우리 인간은 이렇듯 고립된 존재일수 없다. 생겨난 모듯 것은 서로 연되어있으므로 절대불변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결국 고정불변의 아트만이나 인간의 고정된 자아는 없다. 즉, 무아(無我)이다. 이것이 연기론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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