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31일 금요일

피부발진(여드름)에 대해서

피부발진이란 어떤 것이 경계를 뚫고 밖으로 나오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사춘기의 여드름`을 예로 들면 쉽게 실감할 수 있다. 사춘기에는 인간 내면에 있는 성적 욕구가 터져나오지만, 동시에 그것이 요구하는 사항들이 두려워서 억제된다. 그 외에도 사춘기는 갈등 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겉으로는 평온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무의식의 심연으로부터 새로운 요구가 갑자기 분출되며, 그것은 한 인간의 의식과 생활속에서 억지로 활동할 공간을 찾아내려한다. 그러나 밀려드는 새로운 것은 친숙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려고 하며, 그 이전의 친숙한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의 한가운데에 놓인다. 이 새로운 것의 매력과 그것에 대한 불안은 거의 똑같은 힘으로 작용한다. 모든 갈등들은 이 모델에 따라 진행되며 다만 준제만 달라질 뿐이다. 사춘기의 주제는 성적 욕구, 사랑, 배우자가 된다. 반대극의 타자를 향한 동경이 늘어난다. 그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과 접촉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성적 공상들이 생겨나지만, 그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이러한 갈등이 염증으로 변해서 피부에 나타난다는 사실은 분명 납득이 간다. 왜냐하면 피부는 타자를 만나기 위해서 극복해야만하는 자아의 경계임과 동시에 타자를 만지고 쓰다듬을 수 있는 접촉기관이기 때문이다.

이 뜨거운 주제때문에 사춘기 소년들의 피부는 염증을 일으킨다. 염증은 내면의 어떤 것이 지금까지의 경계를 무너뜨리기를 원하며 내면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뿐아니라 새로운 것이 뚫고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노력, 새롭게 일꺠워진 충동에 대한 불안도 보여준다. 여드름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왜냐하면 여드름은 남들과 쉽게 만나지 못하게 만들며, 성적 욕망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악순환이 생겨난다. 인식되지 못한 성적 욕망은 여드름의 모습으로 피부에 나타난다. 그리고 여드름은 섹스를 방해한다. 유혹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억제되면 그것은 피부를 자극하는 것으로 변한다. 섹스와 여드름이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는 그것이 나타나는 부위에 명확히 드러난다.

여드름은 오직 얼굴에만 나타나며, 소녀들에게는 어깨와 가슴의 노출부위에도 나타난다.(때로는 등에도 난다) 나머지 피부 부분에는 여드름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적 욕구에 대한 부끄러움이 여드름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많은 의시들이 여드름 치료를 위해 피임약을 처방해서 좋은 성과를 본다. 이 효과의 상징적인 배경은 명확하다. 피임약은 몸속에서 임신을 한 것처럼 믿게 만들며, 또한 동시에 `그 일`이 이미 벌어졌다고 믿게 만든다. 여드름은 이제 더 이상 저지할 것이 없기 때문에 사라진다.

일광욕을 하면 여드름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반면에 몸을 감추면 감출수록 여드름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제 2의 피부로서 옷은 거리를 두고 손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강조하는 반면, 옷을 벗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을 열어놓는 것의 첫 단계가 된다. 간절히 바라면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타인의 체온을 햇빛은 위험하지 않은 방식으로 대신 경험하도록 해준다. 결국 성적 욕망을 인식하는 것이 여드름을 치료하는 최상의 수단이다.

사춘기의 여드름에 관한 설명은 대체적으로 거의 모든 피부발진에도 통용된다. 발진은 억제된 것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억압의 경계를 뚫고 나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발진을 통해 지금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어떤 것이 나타난다. 이것은 어떠면 홍역, 성홍열, 홍진과 같은 거의 모든 소아질별이 왜 피부를 통해 드러나는지에 대한 이유도 설명해줄 것이다.

소아질별이 나타날 때마다 아이들의 생활에서 새로운 것이 발현되며, 그 때문에 모든 소아질병은 진전단계가 혹독하다. 피부발진이 심할 수록 소아병의 경과는 더욱 급속하게 진행된다. 뚫고 나오는 것이 성공한 것이다. 아기들에게 나타나는 영아습진은 자녀를 충분히 접촉하지 않았거나 정서적으로 등한시할 경우에 나타난다. 영아습진은 이 보이지 않는 장벅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주부습진은 엄마들이 자녀를 마음속으로 혐오하는 이유를 인과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자주 이용된다. 대부분 스스로 깨끗한 피부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특별히 `우아한` 엄마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자주 발생하는 피부병들 중의 하나는 `건선`이라고도 불리는 마른 버짐이다 이것은 경계가 뚜렷하고, 원반 내지 평면 모양을 보이며, 은백색의 비늘로 덮여있다. 비부의 자연적 각질이 마른버짐에서는 도를 넘어선 것이다. 마른 버짐은 동물의 갑각조직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는 피부의 자연적인 보호기능이 갑각으로 둘러싸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마른버짐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방향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들은 어떤 것도 받아들이거나 내보내려 하지 않는다. 이 심리적인 거부와 고립의 경과를 라이히는 `성격갑각`이라고 불렀다. 모든 종류의 방어 이면에는 `상처를 입게되는 것`에 대한 불안이 숨겨져 있다. 어떤 사람의 방어가 더 심하고 갑각이 더 두꺼울수록, 내면의 민감성과 상처에 대한 불안은 더욱 더 크다.

우리가 어떤 갑각류의 껍질을 벗기면, 무방비 상태의 연약하고 상하기 쉬운 모습을 대하게 된다. 어떤 것도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가장 예민한 사람들이다. "거친 껍질 속에는 대부분 말랑말랑한 알맹이가 들어있다."는 격언도 이러한 경험을 의미한다. 그러나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갑각을 사용해서 보호하려는 노력은 비극적 운명을 지니고 있다. 비록 갑각이 상하고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랑과 온정마저도 `막아버린다`. 사랑은 자산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방어를 취약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갑각은 영혼을 생기의 흐름으로부터 차단하며 갑갑하게 만든다. 그리고 불안은 더욱 더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 인간은 귾임없이 두려워하고 방어하기만 할 것이아니라, 영혼이 상처를 입는 것을 그냥 버려두어야만 한다. 그래야 영혼이 그것때문에 파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된다. 경이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상처받기 쉬워져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처는 오직 운명이나 심리치료와 같은 외부의 압박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상처받기 쉬운 민감함과 갑각을 두르는 것의 연관성을 상세하게 설명한 이유는 마른 버짐이 신체의 영역에서 이 연관성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른 버짐은 피부의 생살을 드러나게 하고, 갈라지고 상처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피부는 감염될 위험이 높아진다. 우리는 여기서 극과 극이 어떻게 서로 맞닿아 있는지 알게된다. 그리고 갈라터진 부위와 갑각이 동경과 불안 사이의 갈등을 얼마나 명확하게 꺠닫게 해주는지도 알게된다. 마른버짐은 팔꿈치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잦다. 팔꿈치를 이용하여 우리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팔꿈치로 몸을 받친다. 바로 이 부위에서 조직 경화증이 쉽게 갈라처지는 부분이 나타난다. 마른버짐의 경우에 멀리하고 격리하는 것이 절정에 달했기 때문에, 마른버짐은 그 환자를 신체적으로 다시 `개방되고 상처입기 쉽게`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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