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유럽과 미국의 역사는 인류를 구속해 온 정치적, 경제적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에 집중되어 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특권을 가진 자들에게 항거하여 해로운 자유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억압에 항거해 온 계급은 자유를 위한 줄기찬 투쟁의 단계에서 승리하여 새로운 특권을 지켜야하는 기득권층이 되면 그때에는 도리어 자유를 해치는 적들과 한 편이 되었다.
여러차례에 걸친 반목 속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은 승리해왔다. 인간을 얽어매고 있던 속박은 하나씩 끊어져갔다. 인간은 자연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단계를 넘어 자연을 지배하게 되었고, 교회의 지배를 벗어났으며, 절대왕정의 지배로부터도 벗어났다. 1차 세계대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류 자유를 위한 최후의 전투로 여겨졌으며 그 결말은 자유를 위한 궁극적인 승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단 몇해가 경과되기도 전에 수천년에 걸친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새로운 체제들이 출현했다. 파시즘....
처음에 많은 사람들은 파시즘과 같은 체제가 득세한 것은 광기를 가진 극소수 정신병자들 때문이며 그 광기가 결국 몰락했다는 현실에 안심하게 되었다. 어떤 학자는 이탈리아나 독일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기간이 불충분해서라고 했고 어떤 이론은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오직 권모술수만으로 권력을 득했으며 그와 그 추종자들이 힘으로 국민을 지배해 국민은 단순히 의지없는 피해자정도로 여기기도 했다.
그 후 몇년이 지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의 명백한 오류들이 드러났다. 마침내 우리는 (인정하기 어렵지만) 독일인들이 오래동안 치열하게 자유를 위해서 싸운 것처럼 반대로 치열하게 자유를 포기했으며, 자유를 찾는 대신 스스로 자유로부터 도피했고 그외에 중립적인 사람들마저도 자유의 가치를 하찮게 여겼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 현상이 이탈리아나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근대국가들이 한결같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실은 존 듀이에 의해 잘 서술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은 외국의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개인적 태도와 제도 내부에 외적 권위와 규율, 획일성, 지도자에 대한 의존 등 파시즘이 승리를 얻게 하는 조건들이 있다는 사실을 경계해야한다. 따라서 싸움터는 바로 여기 -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제도 안에 있다."
파시즘을 발생시킨 경제적, 사회적 조건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 자신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근대인의 성격구조에서 이와 같은 요소를 찾아내고 분석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근대인으로 하여금 자유를 포기하게 하였으며, 또한 수억명의 우리 국민들 사이에도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속성을 인지하고 자기 성찰을 통해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또한 나치즘의 키치아래 광기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자유, 복종에 대한 갈망, 권력에의 동경에 주목할 때 일어나는 수많은 의문점이 있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를 바라는 것은 인간 고유의 본성인가? 자유를 바라는 본성은 그 인간이 속한 문화에 영향을 받는가? 자유라는 것이 너무 큰 부담이 되어 사람들이 그로부터 도피하려는 일이 과연 있단말인가? 자유는 왜 소중한 목표가 되면서 또한 동시에 왜 위협으로 느껴지는 것인가? 어쩌면 인간에게는 자유에 대한 욕구 이외에 다른 지도자에게 복종하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가? 복종에는 숨겨진 만족감이 있는 것인가? 그 본질은 무엇인가?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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