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31일 금요일

Self-Image = 1/욕망

`착한여자 신드롬`이 한때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여자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정말로 자신은 사는 것이 착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퍽이나 많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가리켜 `나는 이러저러한 성질`이라느니 `이런 성격`이니 하는 일정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자신이 착하다는 것도 이 같은 셀프 이미지의 한 예다. 그런데 보다 깊이 생각해보면 이 셀프 이미지라는 것은 그 개인의 객관적 성질이라기 보다는, 실은 타인에 대한 자신의 기대 요구의 반영이다. 다시말해, 셀프이미지에서 판명되는 것은 그가 어떤 인간인가가 아니라 그가 딴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기대 또는 요구하고 있는가 하는 일로서, 셀프 이미지는 그 기대 내지 요구를 정당화할 근거로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착한 사람`에 대한 여러가지 성질은 차지하로서라도 자신이 착하다고 `자임`하는 사람이 실제로 착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 실제로 착한 사람과 착한 사람이라고 자임하는 사람, 이 양자는 전혀 별개의 인간이다. 오히려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욕심이 많으며, 사리,사욕,사심으로 기울어 버리기 쉬운 인간이다.

먼저, 그가 어째서 자기는 착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던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그런 판단은

- 그가 약삭빠르고 정치적인 사람들과 장단을 잘 맞추고,
- 남에게 잘 부탁할 줄 알고, 부탁받으면 거절도 잘 하며,
- 약삭빠르게 처신하고, 남을 잘 속이고,

등등을 하였다면 그 또한 보다 잘 살 수 있을 것이었지만, 자기는 그러지를 못하기 떄문에 언제나 손해만 보고 있다는 것이 암암리에 전제로 되어있다.

우리들 개인이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깨달을 때, 그것은 그가 그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이 없다면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문제자체로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란 약삭빠르게 처신해서 잘 살고 싶은 욕망이 남보다 강한 인물이다. 그런 욕망의 강함 때문에 그는 착하게 살면서 보게 되는 손해가 마음에 걸려 자신의 분함을 진정시킬 설명을 찾게 되고 `착한여자 신드롬`같은 용어들은 이들에게 좋은 변명거리를 제공해준다.

본디 어떤 사람에 대한 평판(착하다. 순진하다. 호탕하다. 짠돌이다. 너그럽다 등등)은 그의 실제적인 본질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성격의 판단에는 일반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변사람들 태반에게서 `엄청게 인색한 노랑이`라는 혹평을 받는 당사자는 자신을 `너무 돈을 시원스레 써서 언제나 손해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이는 그가 한층 극단적인 인색함을 상정하고 그것을 일반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노랑이의 관찰자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가 어느정도 인색한가의 판단은 그 사람에 대한 관찰자의 요구로도 좌우되기 때문이다. 바꿔말해 본심이 욕심꾸러기일수록 남을 인색하다고 판단하고, 악하고 약삭빠른 사람일수록 자신을 착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

자신이 아들이나 딸을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제 자식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어하는 엄마, 아빠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애를 낳지 않거나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애를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거나 부모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들의 심리상태를 고찰하보면 자식으로 인한 고생이나 희생에 대해 손해본 느낌이 한켠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으며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에 대한 비난의 말은 고생을 보상시켜줄 합리화된 변명거리를 찾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백한 사실이거니와 자식을 희생해서 이기적으로 사용하고 싶은 욕망이 강한 어버이일수록, 자기는 자식을 위해서 몸바쳐 희생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편과 불화로 항상 싸우는 아내가 툭하면 딸아이에게 말하기를 "몇번이나 이혼하려했지만 널 봐서 참았단다."라고 푸념한다. 종종 딸이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너를 위해 일평생 참아온 어미 말을 거역하니?"하고 성을 낸다. 그녀는 적대적이며 불안정한 부부관계가 지금까지 얼마나 딸아아이게 상처를 주었는지는 생각지도 못하고 도리어 딸아이에게 생색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내 몸은 님을 위해 헌신했건만 배반당하고, 그래도 사람이 그리워 남을 믿다가 배반당하곤 하지요"라는 넋두리를 하는 이가 있다. 당사자는 인간세상의 박정스러움과 에고이즘을 한탄하지만 앞서 어버이의 예와 마찬가지로 에고이스트는 그 자신이다. 그는 남에게 `은인`의 입지에 서서 그들을 이용하고 지배하고픈 욕망이 지나치게 강한 것이다. `남이 그리워서`라는 말은 남을 이용해먹고픈 욕망을 변명거리로 대체시킨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든 여러 사례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욕망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을 때 그를 위해 만들어지는 셀프이미지는 그와 역비례관계에 있다. 즉,

- 약삭빠르게 살아서 단물을 빨아먹고 싶은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신은 착하다는 셀프이미지를,
- 자식을 이기적으로 이용해먹고 싶은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자식에게 희생적인 부모라는 셀프이미지를,
- 인색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는 너무 돈을 헤프게 쓴다는 셀프이미지를,
- 사악한 공격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은 정의의 편이라는 셀프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오만할수록 자신은 겸허하다고 하고, 겸허한 자는 자신을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피해의식이 강할수록 무서운 가해자가 된다. 남의 감정에 몰이해하고 무감각할수록 자신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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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뱅이의 정신분석 2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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