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는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어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은 자기 상실이며, 다시 말해 자기를 있게 한 신과의 관계를 상실했을 때 발생한다고 봤다. 그는 “절망에 대한 안전한 해독제는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절망적 인간의 모습을 주로 그린 뭉크가 말년에 죽음을 응시하고 있는듯한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다.
가볍고 단순하고 작을 것. 경박단소(輕薄短小)는 현대사회의 트렌드다. 여러 갈등과 문제로 배배꼬인 상황에서는 대의명분과 큰 호흡의 생각이 절실할 터다. 그러나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에서라면, 머리를 굳이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 ‘경박단소형 삶’이 생활의 주류가 되는 까닭은 여기 있겠다. 하긴, 행복은 고민을 짧게 하고 즐거움은 크게 느끼는 태도 속에서 꽃피지 않겠는가!
“행복 깊숙한 곳…절망 머무는 곳”
그러나 ‘스톡홀름의 고독한 덴디’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소박한 믿음에 고개를 젓는다. 그는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착각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모두가 절망하고 불행해질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사람은 전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는 탓이란다. 도대체 그는 왜 이렇게 삐딱한 생각을 했을까?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의 이르는 병’은 암(癌)처럼 몸에 깃든 병이 아니다. 이 병은 ‘우리의 가장 고상한 부분’인 정신에 감염되어있다. 인간은 결코 이 병을 이겨낼 수 없기에, 절망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
언뜻 보면, 키에르케고르의 생각은 우울증 환자의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병들어 있는 사람은 의사가 진단 내리기 전까지 자신이 건강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이 절망상태임을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환자는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깨닫고 나서야 의사를 찾아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얼마나 절망 속에 빠져 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절망에서 빠져나올 길도 찾게 될 터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이 절망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 따라, 절망의 정도를 나눈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이다. 이는 마치 알코올 중독자 같은 상황이다. 술꾼은 맨 정신으로 있을 때가 가장 괴롭다. 그래서 자신이 취해있음을 잊기 위해 더욱더 퍼 마신다. 평범한 사람들도 그렇다. 누구에게나 삶이 무의미하고 버겁게 느껴지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 순간에 삶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고민을 잊기 위해서 또 다른 즐거움에 눈을 돌릴 뿐이다. “돈 5달란트를 잃었을 때는 심각해지는 이들도 정작 자기를 잃어버린 데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키에르케고르는 ‘속물근성’이란 말로 절망에서 애써 눈 돌리려는 이들을 경멸한다. 그들은 부유하고 안락한 일상이 곧 인간다운 삶이라고 착각하는 탓이다. “행복의 깊숙한 곳, 이곳이야 말로 절망이 가장 편안하게 머무는 곳이다.” 이런 상태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현명한 충고와 처세술에 귀 기울이면서’ 더 큰 쾌락과 안락함을 끊임없이 좇지만, 결국 절망감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들 터다. 늘어난 아파트 평수와 차의 배기량이 주는 행복감이 얼마나 빨리 증발해버리는지 생각해보라.
키에르케고르는 절망 속의 사람들을 지하와 지상 이층으로 되어 있는 집에 빗대어서도 설명한다. 절망한 사람들은 이층에서 살 수 있는데도 굳이 지하층을 고집하는 이들과 같다. 이들은 이층이 비어있으니 그곳으로 옮기라고 하면 화를 내기까지 한다. 인간은 정신을 최고로 발휘할 때 가장 인간적이지만, 사람들은 굳이 그보다 낮은 감성과 쾌감에 상태에만 머무르려 한다는 뜻이다.
이보다 나은 절망은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깨닫는 절망’이다. 이 단계에 이른 자들은 삶의 허무함과 고통을 더 이상 바깥에서 찾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괴로움이 돈 없고 일이 풀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덧없고 무의미한 삶 자체에서 비롯됨을 깨달은 자들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른 사람들 역시 대부분은 절망 안에서 주저앉아 버린다.
이들 중 어떤 이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려고’ 한다. 자기 자신이 너무 싫은 나머지 ‘마치 옷을 바꿔 입듯이’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그는 유능하고 똑똑하고 훌륭한 인물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또다시 자신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일어나지 않을지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또다시 절망 속으로 움츠러든다.
드물게도 이 수준을 넘어서서 절망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에 대한 절망’에 빠진 이들이다. 이들은 ‘기분전환’을 위해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에 빠져들거나, 다른 이들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왜 절망하는 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삶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지를 끝까지 고민한다. 그럼에도 이들 역시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이 절망은 ‘반항’에 지나지 않으며, 급기야는 아무 희망 없음에 좌절하여 자살에까지 이르곤 한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탓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키에르케코르는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 신은 죽어 사라져버려서 의미 없을 우리네 삶을 비로소 가치 있고 영원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절망은 변증법적이다. 절망은 인생을 힘들게 만들지만, 그 때문에 비로소 거짓 생활을 진정한 삶으로 거듭나게 만들기도 한다. 고난이 인생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깨우칠 때 삶이 더 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가장 높은 단계인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려는 절망’은 신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와 믿음을 통해 완성된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 아닌 ‘신앙’(믿음)
<죽음의 이르는 병>은 우리가 과연 진짜로 행복한 삶을 좇는지 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현대인의 삶은 ‘속도전’이나 ‘돌격전’ 같은 북쪽나라의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반대로, 그 대가로 얻어지는 일상은 가볍고도 단순하며 유쾌하다. 키에르케고르식으로 설명하자면, 우리는 삶의 무의미함에서 이중으로 도망치고 있는 셈이다. 경쟁의 무거움은 덧없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물음 자체를 한가하고 쓸데없는 소리로 만들어 버린다. 무겁고도 치열한 삶에서 잠시 비켜나오면, 이번에는 가볍고도 단순한 오락거리가 우리네 일상을 가득 채우곤 한다. 어디에서도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찾아보기 어렵다.
과연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의 쾌락은 우리 마음을 만족하게 채워줄 수 있을까?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약을 더 많이 구하는 데 있지 않다. 자기 처지를 분명하게 파악하여, 건강한 삶을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에야 절망에서 탈출할 길도 열린다.
키에르케고르는 “믿음은 절망에 대한 안전한 해독제”라고 말한다. 해독제는 자신이 독에 물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내 삶을 절망에서 이끌어 낼 ‘믿음’은 어디 있을까? 기독교 신자인 키에르케고르는 그 답을 신에 대한 믿음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 구원을 찾을 수 있을까?
좋은 물음은 훌륭한 답을 이끌어 낸다. 문제는 제대로 된 물음을 던지기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같은 논리로, 삶에 대한 깊고도 정확한 의문은 가치 있고 높은 경지의 인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짚는 의문을 던지기란 쉽지 않다. 내 삶에 들어붙어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엇인지 곱씹고 또 곱씹어 보라.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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