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감을 유발하는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으로서 현대사회 개인이 가장 많이 상용하는 것은 개인이 자신을 버리고 대중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개인은 일종의 문화적인 양식에 의해 부여되는 성격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혹은 어떤 집단의 사람들)과 전적으로 동일한, 다른 사람들이 그 자신에게 기대하는 상태로 변화한다. 이는 카멜레온이 주변색과 동일하게 몸색깔을 바꿔 보호색을 만드는 메커니즘과 동일하다. ‘나’와 외부 세계와의 갈등은 사라지고 고독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자아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자동인형이 되어 주위 수백만의 자동인형과 동일해진 인간은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고독을 극복하는 방법이 자동인형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상식과 배치된다. 르네상스 이후로 끊임없이 제기되는 인간관은 자유의지, 자율성, 독립적 행동 등이다. 각 개인은 자기는 ‘자기’이고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 욕구는 온전히 ‘자기의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 신념은 환상이다. 더구나 그 거짓된 신념으로 인해 환상을 품게 되는 원인을 발견하기 더더욱 어려워진다. 가령, 내 자유행동이 사실은 내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니?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일련의 질문을 통해 명백해질 심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자아, 자발성, 본질적인 정신의 행위란 도대체 무엇인가? 최면술을 이용하면 아주 쉽게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 파인애플을 먹으면서 마늘맛을 느끼게 할 수 있고, 적절한 상황을 연출하여 어떤 사람에게 극도의 증오를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인간의 개인적 생각, 행동, 감정은 현실생활에서도 최면술처럼 조작되기 쉽다.
가령, 누군가에게 정치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자. 그는 뉴스에 난 기사를 읽고 자신의 의견으로써 답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사고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고 부모님의 정치적 의견이나 주변 친구들의 정치 성향이 권력화되어 반영된 결과다. 그 ‘자신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피상적이며 경험, 욕구 및 지식의 자연적인 결합에 의한 것이 아니다. 동일한 현상이 사회, 경제, 문화, 미적(美的) 판단 등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권위에 복종에 따른 암묵적인 자아상실을 막는 방법은 비판적 사고이다. 그러나 현실의 교육은 비판적 사고를 철저히 억압하고 있다. 산업사회의 노동자를 양성하는 공교육은 그 목적상 비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비판적이지 않은 사고’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애초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은 본질적인 ‘나’로부터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사회나 가족의 기대, 친구집단과의 역학관계, 법적 테두리, 상업광고의 암시 등과 상호작용하고 부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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