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물상(物相)의 본질, `Atman`이란 현존하는가?
여기 문홍철이라는 인간을 보자. 사람들은 나를 홍철이라고 부르지만 실상 고정된 실체로서의 홍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나의 육체는 음식을 통한 신진대사와 효소의 작용으로 끊임없이 갱신되어 6개월후면 내 몸의 구성성분 98%가 완전교체된다. 신체뿐만이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 사상, 사유체계는 1초도 쉬지않고 생각으로 바쁘고 주변사물, 사람들과 상호작용함으로써 `홍철`이라고 보여지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즉, 주변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지속함으로써 이들과 `관계`를 맺고 존재하는 것이 바로 `홍철`이요 만약 이러한 상호작용이 사라지는 순간, `홍철`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시말해, 고정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온 우주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끊임없는 인연으로 묶여있어 어느것 하나 단독으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는 부처의 깨달음과 맞닿아있고 결과적으로 형이하학적인 우주에서 불변하는 실체 `Atman`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러한 불교적 세계관에서 너와 나는 결국 하나이며 대자대비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불교의 자비는 신앙의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연기(緣起)의 깨달음이라는 우주적 명제하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싯달타는 형이하학의 우주적 현상과 별도로 실체를 상정하는 형이상학을 거부했으며 우리가 언어라는 개념으로 Atman을 만들고 실체화시킨 것에 대해 증명할 수 없다고 했다. 사랑,희로애락의 감정, 영혼의 존재, 우주의 유무한, 시간의 유무한, 신의유무 등 모든 실체의 사실은 말할 수 없다. 이모든 것은 인간의 사고가 언어라는 수단으로 표현되어진 Atman의 허구다.
이상과 같은 논리라면 Atman이라는 것이 없다는 쪽으로 흘러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의 문제는 좀더 복잡하다.
가령, `신(神)이 있다 없다`라는 논쟁에 있어서. 둘다 참이라면 이는 이율배반(칸트가 주장한 antinomie)이다. 그런데 이 둘다 참일 수 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서는 싯탈다는 시종일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명제는 무기(無記)의 대상이다 기록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귀신이 있다`도 참이고 `없다`도 참이다. 애당초 `귀신`이라는 Atman을 인간이 만들어 낸 이상 존재함도, 존재하지 않음도 애시당초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있다`는 보여주면 되지만 없다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지금처럼 `있다`를 보여주지 못한 상황에서 없다는 자연 증명 불가능이므로 결론이 나지 않을 수밖에 없다.)증명이 불가능한 명제에 대해 옳다 그르다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정력낭비다.
공자가 말했듯 知之爲知之不知爲不知是知也(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니라)이다.
실상은? 나도 모르겠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