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31일 금요일

2차대전후는 왜 달랐는가?

2차 대전 이후의 세계는 경제성장만 빨랐던 것이 아니라 경기변동성도 낮았고 실업률은 특히 낮았다. 비록 냉전과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세상을 지배했을지는 몰라도 1950~1973년의 시기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부를 정도로 그 흐름이 예외적이고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의 시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는 ‘경제기적’이란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2차대전후 처리의 결과는 왜 1차 대전후의 처절했던 혼란기와 왜그리도 달라졌는가?

역사적으로 세계의 모습은 1919년 이래 변했다. 미국은 2차대전후 자타가 공인하는 서방세계의 리더로 부상했는데 리더로서의 책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물론 세력을 무섭게 확장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베르사유 조약이 남긴 뼈아픈 교훈도 활용되었다. 안정과 번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충분한 국제적 협조가 만들어져야 했다. 미국은 서유럽과 일본이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게 원조하고 적절한 지위를 부여했다.

1차 대전후의 미숙한 문제처리에 무능한 정치인과 중앙은행총재만 비난할 수는 없다. 그 근원은 유럽 역사와 사회, 정치구조에 깊이 뿌리 두고 있었다. 두번에 걸친 완전한 대파멸은 이렇게 공고하게 만들어진 하부구조를 철저히 파괴했고 이는 번영의 밑거름이 되었다.

1941년에 루즈벨트와 처칠은 엄청난 전시채무부담문제가 1차대전후 세계경제의 회복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했다. 그리하여 관대한 무기대여 협약이 맺어졌고 미국과 캐나다는 전쟁물자를 사실상 무상으로 영국에 제공했다. 1944에 맺어진 브레튼 우즈회의는 새로운 국제통화체제의 틀을 마련했다. 미국이 전시에 유지되던 완전고용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유럽이 되살아나고 대서양 무역이 활성화되어야 했다. 미국은 유럽에 원조와 차관방식(마샬 플랜)으로 유럽지역의 거대한 무역적자를 보충해주어 유럽경제를 일으키는데 필요한 다리를 놓아주었다. 이것은 베르사유 조약 이후 만연했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멀리 내다볼 줄 아는 또 다른 출발이었다.

양차대전의 전후처리에 있어서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1920년대는 전시 적대국들 간의 불화로 점철되었다. 특히 배상금과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독일과 프랑스는 치열하게 싸웠다. 2차 대전후 정치 지도자들은 분열되고 파괴적인 정책들은 피하기로 하고 대신 일련의 조치를 통해 1956년 무렵 유럽공동시장의 형성을 도왔다.


- 양차 세계대전 사이기간의 세계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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