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감독이 트리거 해피(Trigger-Happy)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
그는 2006년 월드컵에서 호주 대표팀 감독으로서 호주를 16강에 올려놓은 뒤 떠나면서 호주가 잘 싸웠지만 세계축구의 강대국을 상대할 때 약소국들이 겪어야 하는 운명을 겪었다면서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경기종료를 앞두고 스페인 주심이 마지막 순간에 내린 페널티킥 판정을 "주심의 오심"으로 못박고 이를 '약소국의 운명'으로 설명했다.
그는 "주심의 오심에 대해 너무 불평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탈리아-영국이나 독일-이탈리아 경기였다면 연장전으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호주처럼 역사나 전통이 짧은 나라를 상대하는) 이런 시나리오에서는 심판들이 방아쇠를 당기기 좋아하는(trigger happy) 경찰관처럼 휘슬을 불기를 좋아한다(whistle happy). 이런 상황에선 약소국들이 항상 불리하다고 불평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Trigger-happy 란 미국 경찰들의 행동으로부터 생겨난 단어다. 미국에서 경찰이 범죄자들에게 발포한 통계를 분석해보면 백인보다 유색인종에게 발포한 비율이 월등히 높다.
그렇다고 그 경찰관에게 당신의 발포에는 인종적인 편견이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냐? 고 묻는다면 십중팔구 화를 낸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고 항변한다. 그는 분명 거짓말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통계는 유색인종에 대한 발포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경찰관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길까, 말까를 결정하는 찰나적인 순간에 무의식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찰관의 상태를 일러 trigger-happy라고 한다.
히딩크 감독은 이런 미국 경찰관의 행동양식에 빚대서 축구의 주심이 호주 같은 축구 약소국을 상대로는 ‘기꺼이’ 반칙 휘슬을 불게 된다(whistle-happy)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98년 월드컵에서 대표팀 하석주 선수는 멕시코 전에서 백태클을 이유로 단 번에 퇴장당했다. 1-0 으로 앞서던 상황에서 갑자기 터진 퇴장 사태에 경기를 지켜보던 온 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호주전에서 패널티킥 휘슬을 분 주심이나 하석주 선수에게 레드카드를 내민 주심이나, 자신의 판정은 공정한 것이었다, 결코 어느 나라인지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whistle-happy한 상태였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98년 월드컵에서 백태클을 이유로 단 번에 레드카드를 내민 경우는, 축구 약소국인 한국을 상대로 한 경우 외에는 단 한 건도 없었기때문이다.
trigger-happy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고 보다 냉철히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간의 행동 양식, 어떤 조직의 행동 양식, 심지어 국가의 행동 양식에도 trigger-happy한 상태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편으로,
“약소국들이 항상 불리하다고 불평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는 히딩크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이는 '약소국의 운명'에 체념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정한 승부의 세계에서 ‘주심의 오심’은 언제든지 빚어질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계산에 넣고, 이를 바탕으로 작전을 짜고 싸워나감으로써 '약소국의 운명'을 헤쳐나가겠다는 적극적인 태도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