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31일 금요일

삶과 지성에 대하여

-모든 신전은 마땅히 참배자들에게 개방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신전이라는 게 뭡니까? 예배하는 곳이자, 인간의 마음이 생객해 내었고 인간의 손이 돌로 새긴 이미지인 신의 상징이 있는 곳입니다. 그 돌, 그 상은 신이 아니지요? 그렇지요? 그건 상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징이란 햇빛 아래 선 우리들의 그림자 같은 것이고요. 그림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신전 안에 있는 이 상, 이 상징은 신이 아닙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신전에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그게 뭐 대수로운 일입니까? 뭣 때문에 그런 일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합니까?

진리는 마른 나뭇잎 아래 있을 수 있습니다. 길 옆의 돌에도 깃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석양을 되비추는 수면에, 구름에 짐을 지고 가는 여인의 미소에도 깃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도처에 실체가 있는데 무엇하러 신전에 들어갑니까? 대체로 보아 신전에는 신이나 진리가 '없습니다'. 신전은 인간이 두려움에 못 이겨서 만든 것일 따름입니다. 신전은 안전을 도모하자는 욕심, 종파와 계급 간의 분열을 그 바탕으로 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인류입니다. 신을 찾기 위해서라면 신전은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전은 인류를 분열시키니까요. 기독교의 교회, 최고의 모스크, 힌두교의 사원. 이 모든 신전이 인류를 분열시킵니다. 따라서 신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곳에서 볼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신전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질문은 정치적인 문제에 해당합니다. 현실성이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환경과 싸우고 있는데도 우리의 삶에 평화가 있을 수 있는 것인지요?

크리슈나무르티 : 환경이란, 원래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던가요? 환경이란, 허물어뜨려야 할 대상이 아니던가요? 부모님의 믿음, 여러분의 사회적 배경, 여러분의 관습, 여러분의 먹는 음식의 종류, 종교, 사제, 부자와 가난한 사람 등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과 사물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환경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을 제기하고 저항함으로써 마땅히 이 환경을 허물어뜨려야 하지 않겠어요? 환경에 저항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고만 있으면 평화롭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평화입니다. 반면에 이 환경의 틀을 부수려 몸부림치고, 무엇이 참인지 스스로 찾아 내려고 애를 써 보십시오. 여러분은 괴어 있는 평화가 아닌, 말하자면 죽음의 평화와는 전혀 다른 평화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환경과의 싸움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따라서 평화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을 환경을 이해하고 환경과 싸우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평화가 옵니다. 그러나 환경을 수용하면서 평화를 찾는다면 여러분의 의식은 잠들고 맙니다. 그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저항에 길들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썩을 뿐입니다.


-진짜 삶이란 무엇이죠?

크리슈나무리티 : 참 삶이란 무엇이냐, 조그만 소년이 내게 이 질문을 했습니다. 놀고, 맛있는 걸 먹고, 달리고, 뛰고, 밀고, 이것이 소년에게는 진짜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우리는 삶을 진짜와 가짜로 나누고 있습니다. 전존재를 던져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진짜 삶이라고 일컫을 수 있겠지요. 따라서 내적 갈등도 없고, 하고 싶어 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의 다툼도 없는 삶입니다. 이때 삶은 완벽한 통합 과정에 듭니다. 이 과정의 삶은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도 의존하지 않을 때, 완전한 내적 초월 상태에 들었을 때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할 수 있을 가능성은 이럴 때만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총체적인 자기 혁명 상태에 든다면 정원을 손질하든, 국무총리가 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창성이라는 아주 엄청난 감정은 바로 이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싸웁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사내아이들은 왜 싸웁니까? 여러분은 이따금 동생과도 싸우고, 여기 있는 친구들과도 싸우지요? 왜요? 여러분은 장난감을 놓고 싸웁니다. 다른 아이가 공을 빼앗아 갔다고 해서 혹은 책을 가지고 갔다 해서 여러분은 싸움질합니다. 어른들도 똑같은 이유로 싸웁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아이들의 장난감이 어른의 경우에는 지위, 부, 권력이 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권력을 원한다, 나 역시 원한다, 그러면 우리는 싸웁니다.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전쟁이란 이렇게 단순한 것인데도 철학자, 정치가, 종교인들은 괜히 복잡하게 말합니다. 이것 보세요.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추고도 (삶의 넉넉함, 실존의 아름다움, 투쟁, 정신적 고통, 웃음, 눈물을 이해하고도) 마음을 단순하게 쓴다는 것은 대단한 기술이 없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법을 알 때 비로소 여러분은 마음을 단순하게 쓸 수 있습니다.


-몸이 죽은 뒤에도 영혼은 살아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정말 알고 싶습니까? 어떻게 알아 낼 생각입니까? 영혼에 대한 샹카라나 부처나 예수의 말씀을 읽어서요? 여러분이 섬기는 지도자나 성자의 말씀을 들어서요? 그 사람들 모두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잖아요? 이런 걸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말하자면 당신의 마음은 의문을 제기할 입장에 놓여 있습니까?

먼저, 육체의 사후에도 살아 있을, 그 영혼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 한번 따져 보아야겠군요. 영혼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아니면, 단지 영혼이라는 게 종교의 사제, 특정 서적, 문화 환경으로부터 영혼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를 받아들였습니까?

'영혼'이라는 말은 단지 물질적 실존 너머 존재하는 것이란 뜻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육체, 성격, 성향, 덕성 같은 것은 아시다시피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영혼이라는 게 있다 이거죠. 그런 상태가 정말 존재한다면 이것은 정말 영적인 것,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 영적인 것이 죽음을 초월해서 존재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게 질문의 한 부분입니다.
이 질문의 다른 한 부분은, 죽음이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사후에도 존재하는 게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살아 있으면서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느냐는 거지요. 누가, 사후의 삶이 있다거니 없다거니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당신은 여전히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죽어 본 다음에 아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하고 힘차게 살면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역시 교육이 해야 할 일의 일부분입니다.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수학, 역사, 지리에 능통해지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이 죽음이라는 엄청난 것을 이해할 능력도 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해하되, 육체적으로 죽은 다음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웃고 나무에 오르고 배를 젓고 헤엄치고 할 수 있는 동안에 이해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죽음이란 미지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 이 미지의 것들을 아는 일입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삶과 지성에 대하여」중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