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에서 인류는 최초의 자유를 맛보았다. 지혜의 열매를 먹고 권위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 즉, 죄를 범하는 일은 적극적인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최초의 자유행동, 최초의 ‘인간적’ 행동이었다. 자유의 행동으로서의 불복종의 행위는 곧 이성의 시작이다. 신화는 최초의 자유 행동의 결과와 그 고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과의 근원적인 조화는 파괴되었다.
지혜를 얻은 인간은 혼자이고 자유롭지만 무력하고 두렵다. 새로 얻은 자유는 재앙처럼 느껴진다. 그는 어머니되시는 낙원의 달콤하고 안락한 ‘속박’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자신을 통제하고 개체로서 성숙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인가(가족, 국가, 씨족, 집단, 연인, 어머니 등)에 소속되어 있다는 일차적인 소속감의 관계는 인간적 발달을 방해하며 이성과 비판력의 발달을 저해한다. 이것은 주위 우주와 개인간의 관계를 ‘나와 우주’가 아닌 내가 속한 그 무엇과 우주의 관계로 변질시키고 개인은 그 방패 뒤에 숨도록 한다. 개인은 집단 속에서 안전을 느끼고 가장 끔찍한 고통 – 고립감 – 을 피할 수 있다.
아기는 어머니 품 안이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 속에 머물러서는 건강한 개인으로서 성장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이러한 분리와 고립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자유를 얻는 다는 것에 회의를 품게 되며 자유속에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게 된다. 그 결과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박탈당한다 할지라도 불안으로부터의 구원을 약속하는 외부세계에 대한 복종으로 다른 이들과 모종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도피코자 하는 강력한 성향이 생겨난다.
우리는 오랜 투쟁을 통해 외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내적인 자율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가령 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자유를 위한 승리의 마지막 단계라고 알고 있다. 물론 우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의 숭고한 결과로서 표현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근대인은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소위 opinion leader라고 하는)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즉, 근대인은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잘 깨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데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지시하는 외적 권위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여론과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권위가 가지는 역할을 경시하고 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여론과 상식, 언론의 독재는 그렇게도 강력한 것이다.
이 문제를 보다 심도 있게 알아보기 위해서는 (위험한 의심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자본주의의와 산업사회가 인간의 내적 자유에 미친 영향을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시도했던 인간 영혼의 자유화를 계승하여 이를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확장시켜 나갔다. 봉건제도와 농노해방, 상업자본가의 성공신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으로 촉발된 자유와 평등사상의 확산은 그 어느때보다 인간이 자유롭다는 인식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는 개인의 하찮음을 강조하고 ‘시장’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인간을 소비자라는 개체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개체화는 자연스럽게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문을 품도록 – 혹은 의문 자체를 품지 못한 채 개체화 되어 살도록 – 만들었다. 불안을 느낀 인간은 보다 거대하고 강력한 무엇인가에 소속당해 그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안위와 안정감을 얻으려는 욕구가 생겨나게 된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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