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의 `나`가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데, 한 노인이 다가와 말을 건다. "바쁘지 않으면 내 이야기좀 들어주겠나?"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노인은 어린시절 집에 불이 났다. 불길에 휩싸인 2층집에 갇힌채 그는 공포에 질려 어쩔줄 몰랐다. 너무나 무서웠다. 그러나 그 죽음의 순간 그는 생각했다.
'지금 내가 죽어가고 있다. 연기에 숨이 막혀 너무나 고통스럽다. 조금 있으면 이 뜨거운 불에 타 죽고 말 것이다. 아, 그런데 그게 어떻단 말인가?!? 내가 그 무서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그게 도대체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다행히 그는 불길속에서 구조된다. 그러나 그때 생긴 정신적 상처는 그를 계속 따라다닌다. 청년이 되어 그는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너무 행복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 그는 다시 중얼거린다.
'지금 나는 이 처녀와 사랑에 빠졌다.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없다. 아,,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이냐, 생각해보면 이 사랑하는 여인과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결국 그는 연인과 헤어진다.
그의 '그런데 그게 도대체 어쨌단 말인가' 병은 갈수록 심해져 모든 일에 이런 식의 체념적 상태가 지속된다. 수없이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죽기 직전 그는 항상 이렇게 생각해서 자살을 그만둔다.
'나는 이제 죽을 것이다. 독약을 먹고, 절벽에서 떨어져, 목을 메고 죽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도대체 어쨋단 말인가?' 결국 죽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죽을 수 없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노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은 언젠가 죽을 것이나 죽는 바로 그 순간에도 자신은 분명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 드디어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그게 도대체 어쨋단 말인가?'
내가 교수가 된 지금까지도 이 토니오 크뢰거의 독백은 여전히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종 그와 같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의 경우와는 다르게(?) 내게 이 허무개그적 독백은 아주 건강한 기능을 한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내 삶을 반추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바쁘면 바쁠수록, 정신없을수록, 자기반성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멀쩡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형편없이 망가지는 까닭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게 하는 메타코그니션meta-cognition(자신의 생각을 반추하며 생각하는 것) 능력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성취가 크면 클수록 자기 반추는 사라진다.
'그게 도대체 어쨋단 말인가?'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면 세상이 조금은 달라 보인다. (여담이지만 소설의 제목은 토니오 크뢰거의 독백이 아니었다. 제목은 기억이 안난다.)
- 문화심리학 1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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