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역설적논리학과 사고의 한계

서양 사상에서는 역설적 논리학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 처음으로 철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상반되는 것 사이의 투쟁을 모든 존재의 기초로 보고 있다. `홍철`이라는 말에는 `홍철이 아님`이라는 구별의 의미가 숨어있다.

노자 철학에서 역설적 사고의 특징적인 예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볼 수 있다.

ㅇ무게는 가벼움의 뿌리이고 정지는 운동의 지배자이다.
ㅇ본래의 과정에 있는 도는 하는 일이 없고 그러므로 하지 않는 일이 없다
ㅇ나(노자)의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쉽다. 그러나 이 말을 알고 이 말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에는 한 사람도 없다.


인도인이나 소크라테스의 사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노자의 사고의 경우에서도, 우리는 사고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최고의 각성이고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병이다. 최고의 신은 명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철학의 귀결이다. 궁극적 실재, 궁극적 일자는 언어나 사고로 파악할 수 없다. 밟고 걸어갈 수 있는 도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도가 아니다. 명명된 이름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 도를 알고 있는 자는 도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고, 도에 대해 말할 용의를 갖추고 있는 자는 도를 알지 못한다.

바라문의 철학은 현상의 다양성과 통일성(브라아만)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지각하는 사고는 참된 실재에 도달하려면, 그 자체를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립은 인간의 정신의 범주이고 그 자체로서 실재의 요소는 아니다. 리그 베다에서는 그 원리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나는 둘, 곧 생명의 `힘`과 생명의 `재료`이고 동시에 둘이다. 곧 사상은 무지의 더욱 정묘한 지평이고 사실상 마야의 온갖 교묘한 책략 중에서 가장 정묘한 것이라

역설적 논리학은 신의 개념과 중요한 관련을 갖고 있다. 신이 궁극적 실재를 의미하는한, 인간의 정신이 모순에서 실재를 지각하는 한, 신에 대해서는 적극적 진술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사고는 단지 사고에 의해서는 궁극적 대답을 얻을 수 없다는 지식에 도달 할 뿐이다. 사고의 세계는 역설에 사로잡혀 있다. 세계를 궁극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고가 아니라 행위에, 곧 일체성의 경험에 있다. 이렇게 해서 역설적 논리학에서는 신에 대한 사랑은 사고를 통한 신에 대한 지식이거나 인간의 신에 대한 사랑에 관한 사상이 아니라, 신과의 일체성을 경험하는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사상은 올바른 생활 방식을 강조하게 된다. 생활 전체, 사소하지만 중요한 온갖 행동은 신에 대한 지식에 바쳐지지만 올바른 사고에 의한 지식이 아니라 올바른 행위에 의한 지식에 바쳐진다. 이 점은 동양의 종교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바라문교에서는 불교나 도교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이다. 유태의 전통에는 올바른 생활 방식, 곧 할라카(道)를 강조했다.

역설적 논리학의 관점에서는 강조점은 사고가 아니라 행위에 놓인다. 이러한 태도로부터 인도나 중국의 종교적 발전에서 볼 수 있는 관용이 생겼다. 올바른 사고가 궁극적 진리도 구제에 이르는 길도 아니라면, 사고를 통해 다른 공식에 도달한 다른 사람들과 싸울 까닭은 없다. 이러한 관용은 어둠 속에서 코끼리에 대해 말하라는 요구를 받은 몇 사람의 이야기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한 사람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 보고 이 짐승은 수도관같다고 말했다. 또 한사람은 코끼리의 귀를 마져 보고 이 짐승은 부채 같다고 말했다. 세번째 사람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져 보고 이 짐승은 기둥 같다고 설명했다.

역설적 입장은 한편으로는 교의나 과학의 발달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개조를 강조하게 되었다. 인도, 중국 및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종교적 과제는 올바르게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고, 또한 집중적인 명상의 행위를 통해 일자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서양 사상의 주요한 흐름에서는 이와는 반대되는 것이 참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올바른 사고(혹은 신앙)에 의해서만 궁극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에, 올바른 행동도 동시에 중요시되기는 했지만, 주요한 강조점은 사고에 놓여졌다. 종교적 발전에 있어서 이러한 강조로부터 교의의 정형화, 교의의 정형화에 대한 끝없는 논쟁, 비신자 또는 이교도에 대한 비관용이 생겼다. 더 나아가 종교적 태도의 주요한 목적으로서 신에 대한 신앙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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