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5일 토요일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 란 인간이라는 지적 생명체의 존재 자체가 어떤 물리계의 특성을 설명한다는 원리이다. 인류원리를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카터(Brandon Carter, 1973)였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왜 하필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1억5천만km 떨어져 있을까 하는 문제를 인류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지구가 그 보다 더 멀리 있거나 더 가까이 있다면 지구상에 생명체가 태어나 인간 같은 고등지식을 가진 생명으로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인류원리적인 설명이다. 고전역학에서는 지구가 왜 태양으로부터 이만큼 떨어져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현존하는 최고의 물리학자인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1987년 인류원리로 우주상수 문제를 설명하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우주상수는 우주 공간 자체가 가지는 진공에너지로서 우주의 팽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주상수가 양수로 아주 크면 우주의 팽창이 가속된다.

반대로 이 상수가 음으로 아주 크면 우주가 팽창을 멈추고 중력수축을 시작한다. 이 값은 매우 작지만 0이 아닌 양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값은 양자역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값보다 무려 10^120 정도 작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10^120 정도의 정밀도로 미세조정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런 식의 미세조정을 무척 싫어한다. 그래서 왜 관측된 우주상수 값이 그렇게 작을까 고민해 왔다. 그러나 아직 만족할만한 답은 없다. 우주상수 문제는 21세기 과학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다.


인류원리를 우주상수에 적용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주상수가 너무 크면 우주의 팽창이 그만큼 빨라진다. 우주가 원래 그런 것보다 훨씬 급속하게 팽창하면 별이나 은하가 탄생할 겨를이 없어진다. 별이나 은하가 생기려면 적절한 시점 적절한 곳에서 중력 응축이 생길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우주상수 값이 너무 크면 우주를 밖으로 팽창시키려는 힘이 커져서 그 여유를 주지 않는다. 반대로 우주상수가 음의 값으로 너무 커지면 우주가 충분히 팽창하기도 전에 중력수축을 시작해서, 은하나 별이 생기거나 그 속에서 다시 지적인 생명체가 태어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이 우주에서 인간이라는 지적 생명체가 태어나 자기가 살고 있는 우주를 다시 관찰하려면 그런 지적 생명체의 탄생에 용이한 자연환경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이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우주상수가 너무 커서도 안 되고 너무 작아서도 안 된다. 즉, 적절히 작은 값을 가져야만 우리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 와인버그는 그의 논문에서 현재 물질의 질량밀도보다 약 5~10배 정도 큰 값의 우주상수까지는 인류원리가 허용한다고 추정했다. 현재로서는 인류원리만이 매우 작은 값의 우주상수를 설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인류원리가 과학자들에게 100% 만족스러운 설명방식이 아님은 자명하다. 와인버그 자신도 인류원리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과학의 원리로써 우주상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우주상수의 값이 작기 때문에 인류가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인과관계의 역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인류의 존재가 현재의 우주상수 값을 설명한다면, 그렇다면 우주가 처음 생길 때 먼 미래에 인류라는 지적 생명체의 존재를 미리 기획이라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종교계에서는 오히려 이 때문에 인류원리적인 설명을 더욱 좋아할 수도 있다.




인류원리가 다시 최근에 각광을 받게 된 데에는 초끈이론의 영향이 컸다.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은 끈이론(string theory)을 초대칭화(supersymmetrize)한 이론이다. 초끈이론에서는 만물의 근본이 1차원적인 끈이다. 기존의 뉴턴역학이나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이 만물의 근본을 차원이 없는 일종의 점입자(point particle)로 여기는 것과 매우 다르다. 끈이론이 그 이론 내적으로 일관된 이론이려면 시공간이 26차원이어야 한다. 여기서 시공간을 초대칭화해서 초끈이론을 만들면 그 내적 정합성을 위해 필요한 시공간이 10차원이다. 지금 우리는 시공간 합해서 4차원에 살고 있으니까, 만약 초끈이론이 맞다면 나머지 6차원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4차원 주변에 들러 붙어있어야만 한다. 이 부가적인 6차원이 꽤나 크다면 그 효과를 간접적으로 이미 확인했을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부가적인 6차원은 매우 작은 영역(혹은 매우 높은 에너지 영역)에 조밀화(compactification)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 조밀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이클 더글러스(Michael R. Douglas, 1961~)는 2003년 특정 끈이론에서 가능한 조밀화의 방식이 10^500정도임을 밝혔다. 물리적으로 가능한 초기상태가 대략 이 개수만큼 많다는 뜻이다. 레너드 서스킨트(Leonard Susskind, 1940~)는 이것을 풍경(landscape)이라고 불렀다. 가능한 물리적 초기상태(혹은 진공상태)가 이렇게 많다면 그 중의 하나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 다시 인류원리에 기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서스킨트 등은 최근 이런 유행의 선두주자다. 적지 않은 과학자들이 이 유행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내 주변의 많은 동료 연구원들도 “이제 더 이상 물리를 하지 말자는 소리”라고 불만스러워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초끈이론을 전공하는 한 연구원은 더글러스의 연구결과를 두고서 “일종의 재앙(disaster)”이라며 경악스러워했다.



초끈이론에서 가능한 진공상태가 10^500만큼이나 많다면 소위 다중우주(multiverse)와도 뭔가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을 가질 법도 하다. 다중우주는 ‘유니버스(universe)’에 대응하는 말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이 자연에서 유일하지 않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주론을 연구하는 몇몇 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이런 유의 또 다른 우주가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을 가능성을 얘기해 왔다. 우리와는 다른 다중우주에서는 우리의 물리법칙이나 자연 상수들조차도 모두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말고 또 다른 우주에서는 그 우주상수가 꼭 우리와 같지도 않을 것이다. 심지어 (최소한) 10^500이나 되는 진공상태 각각이 저마다의 우주상수 값을 가질 수 있다면 그 많은 가능성 중에서 10^120 정도의 미세조정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즉, 물리학에서의 거의 모든 미세조정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대신에, 왜 우리가 하필이면 10^500 개의 상태 중 하나에 살고 있는지를 설명해야만 한다. 이것은 어찌 보면 또 다른 미세조정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인류원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우리 인간의 존재 자체가 그 수많은 가능성의 많은 부분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명체가 태어나기에 적합한 환경(은하나 별이나 행성이 형성되는 따위의)이 우주에서 만들어지고 실제로 그 어느 곳에서 생명체가 태어나 오랜 시간 동안 진화가 가능해야 하고 마침내 고등의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생겨날 조건은 매우 까다로운 조건임에 분명하다. 우리 인간의 존재 자체가 우리 우주의 근본적인 비밀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셈이다.


첨단의 과학이론에서 인간 자신의 존재요건이 자연의 비밀을 설명하는 매우 유력한 도구라는 점은 역설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인류원리는 물리학의 최첨단에서 인간과 과학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것 같다. 이처럼 ‘인간 생존의 조건’은 인간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질서를 이해할 때에 매우 유력한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인간답게 살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인류원리가 가장 필요한 곳은 과학이 아니라 사회일지도 모른다.

- 이종필, 고등과학원 원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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