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은 근심걱정에서 진리정신이 살고, 평안하고 즐거운 데서 진리정신이 죽는다"고 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고통만이 하느님의 유일한 사랑이다. 고통을 빼놓으면 사람이 하느님을 찾을 길을 영원히 잊어버린다"고 하였다. 토인비는 역사를 연구하는 가운데 "사람은 반드시 고난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을 알았다(135p)

류영모가 현대인으로 가장 존경한 이는 톨스토이와 마하트마 간디였다. 톨스토이는 그가 한 일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4복음을 통일 요약한 일이다. 그는 이 통일복음서에서 기존 정통파 교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아예 빼버렸다. 즉 동정녀로부터의 예수 탄생 그리고 예수의 육신 부활 등을 제외시켜 버렸다. 그외에 ①세례 요한의 수태와 출생 그리고 세례 요한의 투옥과 죽음, ②예수의 출생, 그 족보, 그리고 애굽으로의 탈출, ③가나와 가버나움에서의 그리스도의 기적, 악마의 축출, 바다 위로 걸음, 무화과나무의 건조, 병자의 치료, 죽은 이의 소생, ④예수의 육신 부활, 예수의 생활에서 성취된 예언의 지적 등이다.

톨스토이는 이것들을 생략한 까닭을 이렇게 말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조금도 교훈을 담고 있지 않다. 글을 번잡하게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예수는 불학무식(不學無識)한 군중에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가 죽은 뒤 오래 있다가 비로소 사람들이 그에 대해 들은 것을 적기 시작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러한 수사본이 5만 종이나 있었다. 그 가운데 세 가지를 고르고 뒤에 또 하나(요한복음)를 더 골랐다. 그 복음 속에는 위경(僞經)이라 해서 버린 것과 같이 좋지 않은 부분이 들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 알고 있는 것처럼 성경의 복음은 모두가 틀림없이 성령으로부터 우리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것과 같은 상투적인 견해에 미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톨스토이, 요약복음서 서문)(193-194p)

이렇게 사도신경에 따른 교의를 부정하는 것을 비정통신앙이라고 일러 왔다. 그러나 사실은 비정통이라는 톨스토이가 예수에게는 정통신앙이다. 베드로가 구술한 것을 기초로 하여 마르코(마가)가 쓴 마르코복음에는 동정녀 탄생이나 예수의 육신 부활이 없다. 마르코복음 16장에 있는 예수의 육신 부활의 구절은 2세기 초 아리스티온이 증보한 것이다. 기독교 신자이면서 비정통신앙을 가진 이는 톨스토이만이 아니다. 토인비, 헤르만 헤세도 비정통 신앙을 가졌다(195p).

우치무라의 신앙내용은 교회의 정통신앙 그대로다. 다만 서양인 선교사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교회를 하자는 것이 우치무라의 주장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측은 무교회라는 말에 교회를 없애자는 것인줄로 착각하고 이단이라며 공격을 하였다(215-216p).

그러나 신앙내용으로는 우치무라는 교회 안에 있고 류영모는 교회 밖에 있다. 우치무라가 형식적인 기독교 개혁을 하였다면 류영모는 실질적인 기독교 개혁을 한 것이다(218-219p).

최선의 길을 걸은 사람은 예수나 석가처럼 종족보존에서 떠나 진리보존에만 힘쓰는 것이다. 차선의 길이 종족보존도 하면서 진리보존도 힘쓰는 것이다. 그 아래는 진리보존은 모른 채 짐승처럼 종족보존만 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진리보존도 종족보존도 못하는 것이다(238p). 나는 어는 곳에 해당될지 반성하는 마음이 앞선다.

류영모는 출가한 스님이 아니다. 기독교의 교의신학이 거짓인 것을 알고는 교회를 떠나 독립불구(獨立不懼)의 길을 용맹정진(勇猛精進)하고자 한 것이다. 공자(孔子)의 말대로 아침에 도를 깨닫고 저녁에 죽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256p). 예수의 사랑, 공자의 인, 석가의 자비 등이 무슨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류영모는 불경을 읽고 배울수록 예수와 석가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석가와 예수의 생각은 대단히 같습니다. 이 상대세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중략) 류영모는 말하였다. "성령을 받아 돈오(頓悟)를 하면 한꺼번에 다 될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오한 뒤에도 점수(漸修)를 해야 합니다. 돈오도 한 번만 하고 마는 게 아닙니다. 줄곧 깨달아 가야 합니다"(257p).

이런 생각을 우리의 믿음에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이신칭의로 믿음을 시작했다면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라는 야고보서에 따른 실천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비록 바울에 의해 배척되긴 했지만 야고보가 초대 교회의 지도자였고 그 내용이 실천지향적이라는 점에서는 지금의 우리가 똑같이 배척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1937년 1월 3일 오류동에서 있었던 류영모의 독생자론(獨生子論)은 김교신을 비롯한 정통신앙인들에게는 원자탄과 같은 것이었다. 이제까지 예수의 육신을 독생자로 믿어 왔는데, 류영모는 예수의 육신이 독생자가 아니라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이 독생자라고 한 것이다(321p).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신비하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전체(全體)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존재이시다. 하느님은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는 무한한 존재이시다. 하느님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신령한 존재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생사(生死)를 넘어선 얼의 존재이시다. 하느님은 애증(愛憎)을 넘어선 사랑의 존재이시다. 하느님은 희비(喜悲)를 넘어선 기쁨의 존재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나(自我)를 죽이고 하느님에 이르면 말씀이 쏟아지고 사랑이 샘솟고 기쁨이 넘친다(389).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아직도 하느님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없이 계시는 성령님이라고 해도 잘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나의 양심을 일으켜 세우는 그 무엇이 성령이 아닐까.

예수 석가가 보여 준 삶이나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디가 보여 준 삶이나 마찬가지로 삼독(탐진치)의 나를 초월하자는 것이다. 성령이 먼저 와서 삼독이 물러서느냐 삼독을 먼저 쫓아서 성령이 오느냐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도 성령을 주시려고 하는 것은 틀림없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줄탁의 은총과 기도가 맞아야 한다(423p).

이 책은 다석사상전집의 첫 번째 책이다. 다석(多夕) 류영모(1890-1981) 선생에 대해서는 모두 잘 모른다. 그렇지만 온 생애에 걸친 진리를 추구하여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이다(표지안쪽 저자 소개에서). 처음 다석선생을 대하는 분들은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나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배움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깨달음이 모자라서 많은 말을 보태기가 어려운 것 같다. 그게 소위 말하는 사족이 될 염려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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