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구속과 슬픔으로부터의 자유

질문자 : 선생님 구속과 슬픔으로부터 풀려난다고 해도 어떻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앞의 슬픔으로부터 스스로를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우리가 고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통은 마음이 그 자체의 불완전함을 깨달도록 마음에 가하는 충격이 아닌가요? 그 불완전함에 대한 인식이 슬픔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여러분이 그 불완전함을 채우기 위해 여러분의 부모나 자식, 배우자에게 의존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의존하는 사람의 상실에 의해서 그 공허함, 허무함의 완전한 의식이 생겨나고, 그 의식으로부터 슬픔이 나오고, "나는 어떤 사람을 잃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통해 먼저 공허함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공허함을 여러분은 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존성이 있는 곳에는 공허함, 천박함, 불완전함, 그리고 슬픔과 고통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내 친구, 내 남편, 내 아이, 내 애인이 그립다. 어떻게 내가 이 상실감과 슬픔을 극복해나갈 것인가?"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제발 귀 기울여 들으십시요. 모든 극복욕구는 대체일 뿐입니다. 그 속에는 이해가 없고, (완전한 대체물을 순간적으로 찾더라도)더한 슬픔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죽은자를 위해 무당을 찾거나 죽음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종교적 믿음, 혹은 과학적 증명에 도피하고자하고, 순간적으로나마 고통을 피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도망치고자 하는 욕망을 그치고, 무엇이 고통과 슬픔을 일으키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욕구가 진정으로 있다면, 여러분은 외로움, 천박함, 공허함, 불완전함이 있는 한 반드시 고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체물이나 도피에 의해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진실의 거울, 즉 지성 그자체입니다. 그것을 이용하여 사물을 볼 때, 기쁨과 환희가 있으며 그 속에는 아무런 이원성도, 상실의 감정도, 분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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