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육체와 양극성의 문제

육체와 정신의 합일 인식과 더불어 인도에서는 요가라고 불리는 신비적인 방법이 마련되어 있었다. 요가는 산스크리트어이며, `멍에`라는 뜻이다. 멍에는 항상 두개로 나누어진 것을 하나로 합쳐준다.

한쌍의 황소, 한쌍의 물통 등, 요가는 두가지로 분리된 것을 하나로 합치는 기술이다. 성생활이 도의 기본모델을 내포하고 있고, 동시에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서 보여주기 때문에, 성생활은 모든 시대에 걸쳐 도를 유추적으로 묘사하는 데 즐겨 사용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관광객은 동양의 사원들에 그려진 포르노그래피적인 조각상들을 어리둥절해하며 바라본다. 하지만 신상의 성적인 결합은 `대립되는 것들의 결함`(conjuncito appositorum)이라는 위대한 비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기독교 신학이나 유교사상이 발전해오면서 때때로 육체적인 면화 성적인 면을 너무나 악한 것으로 매도했기 때문에, 그 문화에서 성장한 우리는 섹스와 정신적인 길이 회동할 수 없는 대립관계에 있는 것처럼 짜 맞추고 싶어한다. 스스로 `신비를 추구한다`고 여기는 수많은 분파들에서 조차도 육신과 정신을 대립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그리고 이들은 육체적 억제를 통해 정신적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위와 아래는 같다`는 말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들에 대한 비판은 충분할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아래에서 해낼 수 없는 것은 결코 위에서도 이루지 못한다는 결론도 도출된다. 그러므로 성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은 도피하는 것으로 그것을 치유하려고 하는 대신, 신체적인 영역에서도 그 문제를 해결해야할 것이다. 대립되는 것을 통합하는 것은 `더 높은`영역에서는 훨씬더 힘들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프로이트가 인간의 거의 모든 문제들을 성욕의 문제로 단순화시킨 이유도 어떠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은 당연히 그 정당성이 인정되며, 다만 사소한 형식상의 오류가 있을 뿐이다. 그 오류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의 영역에서 그 이면에 놓인 원리로 옮겨가는 마지막 단계를 프로이트가 단념했다는 것이다. 성욕은 `양극성`내지 `대립의 해소`라는 원리가 표현될 수 있는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일반화된 형식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비판자들도 인정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양극성, 그리고 대립되는 것을 통합하려는 노력으로 단순화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극성의 문제를 처음에는 성욕의 영역에서 터득하고 처리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옳다. 성 관계와 배우자 관계가 인간들에게 갈등을 일으키는 주요 요인을 제공한다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로 통합되는 지점을 찾아낼 때까지 계속해서 인간을 둘로 나누너 놓는 그토록 힘든 `양극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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