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선악을 넘어서...(도덕의 계보) - 2

결정적으로 우리가 `깨어있다`면 이미 내재적 좋고 나쁨을 판별할 수 있으며 충분히 살아갈 수 있기때문에 편법으로 사용했던 상징계나 초월적인 선악론 같은 것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금 여기에서 사는 삶에 있어서 어떤 것이 좋은 거고 어떤 것이 나쁜 건지 순수하게 내재적으로 상대적으로 다양성에 의거해서 스스로 판단할 지성과 지혜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이 스피노자의 자유인이고 니체의 초인인 것이다.

깨어있는 자에겐 더이상 상징계는 필요가 없다. 그런 편법을 쓰지 않아도 이제 지금 여기서 그에게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겐 유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윤리도, 전통도, 관습도, 그 어떤 초월적인 것도 필요하지 않다.

상징계와 초월적인 관념적 선악론이 가진 최악의 부작용은 `죄(罪)`의 탄생이다. 물신주의적 신봉이 선악을 절대화함에 따라 초자아가 생겨나고, 그것이 금지를 낳고,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을 만들어낸다. 즉 `죄`의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내재성에는 죄는 없다. 삶은 무구하다. 악은 단지 나쁜 만남일 뿐이고 순수하게 내재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질병은 중독과 소화불량같은 내재적인 것일 뿐이고 죽음은 관계의 해체일 뿐이다. 슬픔은 무능력 이고 초자아는 두려움이다.

스피노자는 왜 인간이 스스로 복종을 욕망하고 예속을 갈망하는가 라고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다. 왜 인간은 자유에서 스스로 도피하는가?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롭기 위해 필요한 지성에 의한 내재성의 인식이다. 반면에 복종과 예속을 강요하는 초자아-상징계들은 그 복종하는 주체에게 아무런 인식도 주지 않는다. 복종은 무조건적이어야 한다. 그것을 어기면 죄가 된다.

`선악`은 초월적 심판이고 `좋고 나쁨`은 내재적 인식에 의한 판단이다. 선악은 복종과 초자아-상징계에 대한 예속을 낳고 인식을 방해한다. 동성애는 왜 안돼? 인권은 왜 당위야? 왜 약자를 보호해야하지? 이런 말들에 복종과 예속을 강요하는 상징계는 아무런 인식도 주지 못한다. 즉, 그들 자신들이 이미 그것을 만들 당시의 내재적 조건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복종과 예속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철학은 내재성을 사유하고 그것을 인식한다. 그래서 복종과 예속에 의해 존재하는 선악과는 대립할 수 밖에 없다. 스피노자와 니체에게 삶은 무구한 것이다. 거기엔 선악은 없다. 내재성에 기반한 좋고 나쁨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롭다는 것`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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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하드디스크의 후미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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