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사고의 양극성

예수께서 가라사대 만약 너희들이 저둘을 하나로 만들고 안쪽을 바깥쪽과 같이 만들고, 바깥쪽을 안쪽과 같이 만들고, 위쪽을 아래쪽과 같이 만들고, 남성과 여성을 하나로 합쳐서 남성은 남성답지 않게, 여성은 여성답지 않게 되도록 만든다면, 눈이 하나 있는 자리에 여러개의 눈을 만들고 하나의 손과 하나의 발 대신에 다른 손과 발을 만들고 하나의 모습대신 다른 모습을 만든다면, 너희들은 천국으로 가리라.
-도마복음 22장 21절-


인간은 나라고 말함으로써 이미 `나`가 아닌 것, 즉, `너`라고 여기는 모든 것과 거리를 둔다. 이러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인간은 양극성의 포로가 된다. 그러므로 자아(ego)는 인간을 대립의 세계에 묶어둔다.

이 세계는 자아와 비자아뿐 아니라, 안과 밖, 남자와 여자, 선과 악, 옳은 것과 틀린 것으로 나뉘어져 있다. 인간의 자아는 통일성이나 안전성을 알아차리고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며, 그것들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의식은 모든것을 대립쌍으로 쪼개고 나눈다. 이 대립쌍들이 우리에게 과도하게 작용하면 우리는 그것을 갈등으로 받아들인다. 대립쌍은 구분을 짓게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이성이 하는 일도 현실을 끊임없이 점점 더 작은 조각으로 나누고(분석), 그 조각들을 구분하는 것(식별)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한쪽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 반대쪽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대립되는 것은 서로 모순관계에 있기 대문이다. 그러나 매번 배제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온전하지 못한 상태를 고착화시킨다. 온전하지기 위해서는 부족한 것이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마 여기서 우리는 질병과 치유라는 테마가 양극성과 얼마나 밀접하게 결부되어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더욱 명확하게 나타내자면 질병은 양극성이며, 치유는 이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가 받아들이는 양극성의 이면에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일자, 즉 대립관계들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통일성이 놓여있다. 이러한 존재영역을 만유(萬有)라고도 부르며, 이것은 의미 그대로 모든 것을 포괄한다. 따라서 이 통일성 외부에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통일성 속에는 변화도 없고 발전도 없다. 왜냐하면 통일성은 시공간의 지배를 받지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된 영원한 휴지(休止)상태다. 그것은 오로지 존재할 뿐 형체도 움직임도 없다. 통일성을 나타내는 모든 내용이 부정적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즉 시공이 존재하지 않으며 변화와 경계도 없다는 것이 꺼림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긍정적인 표현은 분열된 세계에서 생겨난 것이며 통일성에 적용될 수 없다.

통일성은 무(Nicbits)다. 이러한 설명은 올바른 것이지만 인간들에게는 자주 엉뚱한 연상을 하도록 만든다. 특히 사람들은 불교에서 도달하려는 열반의 경지가 무와 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대부분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인간의 자아는 항상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리고 모든 것과 하나가 되기 위해 자아가 오로지 소멸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싫어한다. 그러나 통일성 속에서는 모든 것과 무가 하나로 된다. 무는 어떤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거나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양극성을 보이지 않는다.

모든 존재의 근원은 무이다. 이것은 정말로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것이며 시작도 끝도 없고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진다.

-----------------------------------------------------------
역설적 논리학 `진리의 말씀` 편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