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원시종교만이 진실에 가깝다.

본디 모든 종교는 초기 그 종교의 시조로부터 수많은 변형과 상황논리에 따른 첨삭을 수없이 이루게 된다. 이로 인해 본디 가지고 있던 의미가 변질되고 대중을 호도하게 되거나 시대의 요구사항에 타협하여 지배 이데올로기로써 채용되는 예가 많다. 불교와 기독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희석되고 왜곡된 초기 경전과 말씀을 구해서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를 최소화 시키기 위해서 그대가 진리를 찾는 자라면 그 종교 태초의 컨셉을 이해하는데 경주해야 한다.


`윤회사상`은 시타르타의 사상이 아니다. 시타르타의 사상은 오직 진리를 깨닫는, 깨달음의 사상일 뿐이다. 시타르타가 죽은 이후 원시 불교는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끌어들인다. 인도의 민속사상과 힌두교에 석가모니의 과학적인 인과론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써 채용된 윤회사상이 결국 본질을 호도하고 주류로써 자리잡은 양상이다.


`참선`도 고행의 일종일 뿐이다. 본디 시타르타도 오랜 고행을 마치고 그 고행으로써는 해탈에 이루지 못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시타르타의 모습은 보리수와 코브라 아래 가부좌를 틀고 있는 앙상하나 고매한 모습이다. 핵심은 비켜간 채 고행하는 그의 모습을 찬양하는 모습이 마치 66권의 성경을 맹종하는 독실한 기독교도와 같다.


예수의 말과 사상을 가장 크게 오도한 자는 누구인가? 그는 사도 바울이다. 로마 지역에의 포교를 통해 그는 본래 예수의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이미지상으로 본 환상 속의 신적이미지를 대입시켜 예수를 신격화했다. 그가 기독교의 확장과 수용에 엄청난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는 진실을 왜곡한 것 또한 명백하다.


본디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집단적인 추종이나 수용으로는 진리에 이를 수가 없다. 그대가 진정 종교를 통해 마음의 편함만을 추구하는 데서 끝낼 것이 아니라면, 괴롭고 멍에가 되는 진실을 볼 용기가 있다면, 끊임없이 의심하고 흐림 없는 눈으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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