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은 우연히 다가왔다. 1989년 여름, 고르바초프의 개혁노선에 따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쪽 국경을 개방한다. 동구권 국가로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헝가리로 여름휴가를 떠난 동독 주민들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개방된 국경을 통해 아예 동독을 탈출하려 한 것이다. 복잡한 외교적 협상과정을 통해 헝가리는 동독 주민들의 탈출을 허가한다. 그때부터 동독인의 탈출은 걷잡을 수 없게 돼버렸다.
동독 공산당은 동독 주민을 달래기 위해 여행자유화 법안을 통과시킨다. 원래 이 법에 관한 내용은 11월10일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9일 저녁 동독 공산당을 대표해 언론 브리핑을 주관하던 귄터 샤보브스키라는 정치국원이 아주 엉뚱한 실수를 저지른다. 기자회견장에서 법안 통과에 관한 메모를 전달받은 샤보브스키는 아무 생각없이 바로 여행자유화를 선언해버린다. 흥분한 기자들이 질문했다. 언제부터인가? 샤보브스키는 아주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지금부터다. 누구나 신청하면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을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다.”
라디오와 TV를 통해 이 소식을 들은 동베를린 주민들은 떼지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왔다. 베를린 장벽을 지키던 국경경비대원들은 총부리를 동베를린 주민들에게 겨누고 경비대장의 눈치만 봤다. 전화기를 들고 어쩔 줄 모르던 경비대장은 부하들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동베를린 주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도끼와 망치로 수십년간 버텨온 베를린 장벽을 부숴버렸다.
역사는 늘 이런 식이다. 샤보브스키의 엉뚱한 브리핑이 없었더라면 베를린 장벽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실제로 동독지역에서 동독 공산당과 맞서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던 그룹은 더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원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자본주의는 절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실제로 독일 통일이 일방적인 자본주의로의 통합으로 진행되자 그들은 거세게 저항한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이렇게 역사는 필연적 인과관계보다는 아주 황당하고 우연한 방식으로 변화한다. 한반도도 분명 예외는 아니다.
장벽을 뚫고 서독으로 넘어온 다음날부터, 서독 시내의 섹스숍은 동독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붉어진 얼굴로 섹스숍을 나서는 그들에게 기자들이 느낌을 묻자, 그들은 그랬다. 망해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인데, 오히려 사회주의가 망했다고.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단지 노동력 재생산의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동독의 현실 사회주의는 인간 욕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과했다. 왜 인간에게 발정기가 없는지를. 인간은 매일이 발정기이고, 섹스는 행복과 재미를 보장해주는 가장 즐거운 놀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자본주의는 아주 교묘하게 이를 상품화한다.
장벽 붕괴 1년 후 동독과 서독은 법과 제도적으로 하나의 나라가 된다. 이후 동독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독 자동차를 구입한다. 오직 차를 사기 위해 장벽을 무너뜨린 것처럼 보였다. 동독 사람들은 모이면 새로 산 차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한때 동독에도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차가 있었다. 트라반트, 애칭으로 트라비라고 불리는 자동차다. 1957년에 개발된 이 자동차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로 개발됐다. 2기통이지만 시속 120km를 달렸다. 효과적인 연비는 물론이고,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차체 역시 세계적인 화젯거리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동독 공산당은 더 이상 빠른 차는 자본주의의 사치라고 했다. 사회주의적 인간에게 더 예쁜 차는 필요없다고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트라비의 디자인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더 빠른 속도를 위한 기술개발도 없었다. 그 사이, 서독의 메르세데스 벤츠, 베엠베, 폴크스바겐은 매년 새로운 차를 만들어낸다. 그 차들은 시속 200, 300km까지 달린다. 서베를린과 서독 본토를 잇는, 동독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아우토반에서 바람처럼 달리는 서독의 차들을 트라비를 탄 동독 주민들은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볼 따름이었다. 통일이 되자, 그들은 트라비를 농장 한구석에 처박아버린다. 그리고 서독의 번쩍이는 차를 사서 서유럽으로 한없이 달려 나아갔다.
- 김정운 교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