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노자와의 대화 - 니체

* 니체 : 노자께서는 실체적 존재자들은 인정하십니까?

* 노자 : 우리가 실체적 존재자라고 아는 것은 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그대 말처럼 끝없는 動의 과정이다. 연속된 動의 흐름 속에서 고정된 실체를 찾을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그대 자체가 또한 動이다. 動으로써 動을 보고 있는데 그대가 확신할만한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겠는가? 설사 그대가 나름대로 확신한 실체가 있다하더라도 한순간도 멈춤 없이 흘러가고 있으니 그대가 잡은 실체는 어디에 남아 있단 말인가? 그대의 기억 속에? 기억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는 動이 아니던가? 기억  또한 動인 그대의 것이 아니던가? 이처럼 動의 세계란 마치 꿈이나 환상과도 같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곧 존재계요 動의 세계다.

* 아인슈타인 : 우주에는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는 제 발견과 유사하군요.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것은 즉 動의 세계에는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란 말로 대체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제가 본 바로는 動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입니다. 그래서 E=mc² 란 공식이 나왔죠. 즉 물체의 속도가 광속에 가까워질수록 그 질량이 무한대로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가령 소립자 하나를 무한히 가속시키면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그 하나의 소립자가 우주와 맞먹는 에너지를 지닐 수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입자 하나를 무한히 가속시키려면 전 우주와 맞먹는 에너지가 먹히고, 그 에너지를 잡아먹은 입자는 결국 전 우주의 질량과 같은 질량을 지니게 됩니다. 이렇게 바뀌나 저렇게 바뀌나 에너지가 곧 질량이라는 위 공식대로 된다는 거죠.

* 노자 : 그대 말처럼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해도 우주를 벗어날 수는 없다. 즉 動의 세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만약 빛보다 더 빠른 무엇이 있다고 치자. 너무 빨라 빠름의 극한이라면?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너무 빨라서 모든 지점에 동시에 가 있는 것과 같다. 모든 지점에 동시에 가 있다는 것은 더 이상 갈만한 곳이 없다는 말이다. 즉 無所不在인 것이다. 많은 이들이 無所不在하는 것을 神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 말은 곧 動의 극한이 不動과 같다는 말이다. 가장 빠른 것이 神이라면 神이 또한 不動인 것이다. 그대 속에 不動이 있다. 그대 속에 神이 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존재계를 확인 불가한 動으로 보라. 속도건 시간이건 공간이건 다 動일 뿐이다. 動 속에서는 실체를 잡을 수 없다. 유무를 확인할 수 없다. 이 말은 動의 세계가 幻과도 같은 세계란 말이다. 환상을 실체라고 여기고 계속 붙잡고 있을텐가? 아니면 환상을 환상으로 볼텐가? 진정 환상이 옳다면 그대들의 고뇌는 또 무엇이겠는가?

* 니체 : 動의 세계를 인정치 않으면 죽음과도 같습니다. 動 없이 어찌 삶이 있겠으며 이 모든 것을 알겠습니까? 지금 노자께서 알려준 것이 진실이라 해도 그것을 진실로 알아듣는 행위자체가 動이지 않습니까? 노자님의 말씀대로라면 노자께서도 또 하나의 動이지 않습니까? 실체 없는 動이 어찌 실체를 말씀하십니까?

* 노자 : 그렇다. 動으로 動을 가리켜 봐야 늘 빗나간다. 나는 바로 이 빗나간다는 사실을 전할뿐이다. 나는 그대가 내 말을 깊이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또한 나는 그대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은 침묵이다. 나는 내 속의 不動을 그대로 하여금 눈치채게 하고 싶다. 그대 스스로 그대 속의 부동점을 눈치채게 하고 싶다. 그대가 動으로 흐르는 한, 나와 그대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 그대와 내가 함께 가진 그것이 바로 不動이다. 모든 動의 공통분모가 바로 不動이다. 動은 제 각각이며 서로 다르지만 不動은 모두에게 똑 같다. 내가 모순 속에 입을 여는 것은 그대와 진정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대 속의 나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대 속의 不動을 해방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대 속의 나를 해방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진정 그대 속의 不動을 만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대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 니체 : 사람이 몸을 입고 살아 있는 동안은 존재 자체가 늘 動일텐데 어찌 不動의 자리에 들 수 있다고 하십니까?

* 노자 : 不動의 자리에 든다 함은 모든 動을 멈추라는 말이 아니다. 몸은 가만히 놔둬도 언젠가는 저절로 不動으로 돌아갈 것이다. 몸은 그 자체가 자연이다. 몸은 자연의 흐름에 맡겨 두라. 몸은 몸이 알아서 할 것이다. 다만 그대가 動의 존재로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감각과 감정과 생각과 의지와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무형의 動들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을 제대로 動으로 알았다면 모든 動을 실체로서는 부정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사실적인 것으로 보인다해도 그것은 마치 거울에 비치는 움직임과 같아야 한다. 혹은 스크린에 비치는 영화와 같을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그대의 시각이  바른 시각이 될 것이다. 바른 안목을 갖추면 환상을 실체로 오인하여 집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영원히 거짓 꿈속을 헤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삶은 영화보다 더 리얼한 영화이다. 영화는 시각과 청각이 주가 되지만, 삶은 모든 감각과 감정과 생각과 의지와 의식과 무의식등이 총 동원되어 체험하는 초특급 입체 영화다. 이 얼마나 사실적인 영화인가? 그대가 그대의 몸이라는 입체 영화관 속에 들어온 이후 그 누구도 이 영화의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는 아직도 영화를 참 현실로 오인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動의 세상이다. 動은 動으로 이어져 있으며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 영원히 반복되는 롤러코스트를 타고 때로는 환희의 소리를, 때로는 탄식의 소리를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 삶이다. 그대는 여전히 그 대열 속에 있다. 그리고 점점 청룡열차는 가속이 붙는다. 그대도 점점 가속을 즐기고 있다. 動 속에 動으로 사는 것이 영원히 아무런 문제없이 행복한 것이라면 누구도 動을 문제삼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는 動의 세계에 살면서 계속 괴로워한다. 그대는 괴로움을 면하기 위해  動한다. 배고픔은 먹이를 향한 動을 낳고, 배고픔의 動이 확대되면 전쟁이라는 크나큰 動을 일으킨다. 물론 배를 채우면 잠시 행복을 얻는다. 하지만 배고픔의 苦는 반복된다. 動도 반복된다. 배고픔 뿐 아니라 지나친 배부름도 苦이기는 마찬가지다. 이처럼 그대가 얻는 만족은 범위가 있으며 그 범위는 미세하고 좁다. 그렇게 좁은 범위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니 그 범위를 벗어난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계속계속 動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대는 動이다. 그래서 그대는 苦이다. 그대 존재의 苦가 動을 유발하는 원인이다. 하지만 모든 動 속에는 不動이 있다. 우리에게 전혀 길이 없는 것이 아니다. 動으로 動을 좇지 말고 당장 不動에 머물 수 있다면, 그대의 몸이 비록 動으로 남아있을지라도 고향집 소식을 들을 수 있으리라. 그대 감정이라는 動, 그대 사고라는 動, 그대 언어라는 動, 그대 의지라는 動, 그대 의식이라는 動, 그대 무의식이라는 動들을 不動이라는 고향집으로 돌려 보내라. 그대 몸은 動이라는 입체 영화관이다. 끝없이 수많은 영화관을 돌며 動만을  반복할텐가?

끝으로 한마디 덧붙이건대 만약 그대가 이 말을 듣고 당장 생각을 멈추고자 끙끙 애나 쓰고 앉았다면 나는 매우 슬플 것이다. 이는 그대가 참으로 動의 세계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알겠는가? 이 말 끝에 알았다고 일러도 30방 맞을 것이요, 몰랐다고 일러도 30방 맞는다고 하는 이유를......


* 니체 :

"제 철학의 핵심은 일원론적 <힘 의지>, 즉 <진리 의지>입니다.

세계는 힘의 의지를 축으로 영원히 도는 생성의 무대이며
그래서 언제나 과정만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지요.

다시 말해 세계 속에 실체적 존재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지만, 그 존재자들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힘이라는 말입니다.

즉, 실체(이성)가 힘(힘 의지)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힘이 실체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 노자 :

"그대가 말한 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그대가 말한 힘의 다른 이름은  곧 動이다.
그 <힘 의지>가 무엇이건 그것이 動인 것은 분명하다.

그대가 말한 <힘 의지>를 중심으로 세계가 생성하고 도는 과정이라면
그 <힘 의지>는 무엇을 중심으로 삼는가?

<힘 의지>가 무엇인지 그 실체를 규명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하나의 動인 것만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대가 얻은 결론은 여전히 動으로 남아 있다.
動으로 動을 파악했을 뿐이며 여전히 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대의 초인은 그래서 아직도 초인을 향한 動의 초인인 것이다.
그대는 사람의 動 가운데에서 의지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대여, 動의 중심에는  언제나 不動이 있다.
不動을 축으로 하지 않은 動은 없다.

그러니 그대여, 動을 따라 흐르지만 말고
지금 곧 바로 不動寂照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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