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르트르 : 존재근거가 텅 비어 있으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근거를 채우기 위해 무언가 외부대상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계속 자신의 바깥을 욕망한다. 하지만 애초부터 결핍되어있던 것이 외부대상으로 채워질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존재는 끊임없이 외부대상을 지향하면서도 그때마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근거가 아니라고 부정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순간순간의 욕구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순수한 존재방식은 욕구이다. 인간에게 자유는 선고된 것이다. 결핍과 무근거라는 본성 때문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이 자유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겪는 즐거운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존재의 무근거성에서 비롯되는 숙명적인 부담이다. 하지만 대자존재와 대비되는 즉자존재는 자기충족적이므로 자유가 필요 없다. 자신의 존재, 자신의 자유에 부담을 느끼는 것은 오직 대자존재뿐이다.
* 노자 : 그대가 말한 존재근거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이 곧 不動이다. 하지만 그 비어 있음으로 인해 채우려는 욕망은 動이다. 그대가 말한 텅 비어있음은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부족함이 아니라 그냥 不在일 뿐이다. 그대가 말한 대자존재의 자유도 그래서 動의 자유인 것이다. 그대 말대로 즉자존재는 자유조차 필요치 않다. 그러니 대자존재가 결국 이를 곳이 어디이겠는가? 크리슈나여... 한마디 거들어 보시오.
* 크리슈나무르티 : 자유로부터의 자유......
* 사르트르 : 그 자유가 바로 자살이다.
* 노자 :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생물학적 자살이 아니다. 그대 에고의 자살이다. 그대 마음의 자살이다. 그대 생각의 자살이다. 그대 감정의 자살이다. 그대 動의 자살이다. 자살이란 바로 不動에 드는 것이다. 마음의 부동이란 없다. 마음의 不在만 있을뿐이다. 생각의 부동이란 없다. 생각의 부재만 있을뿐이다. 감정의 부동이란 없다. 감정의 부재만 있을뿐이다. 에고의 부동이란 없다. 에고의 부재만 있을뿐이다. 動의 부동이란 없다. 動의 부재만 있을뿐이다. 부동에 가까워질수록 動은 약해진다. 부동에서 멀어질수록 動은 강해진다. 動을 쉬는 순간 부동에 다가간다. 쉬고 또 쉬는 이것이 동을 멈추는 것이요 동을 죽이는 것이다. 動을 쉬면 부동이 그대를 빨아들일 것이다. 결국 그대라는 에고의 動이 계속 빠져 죽어야 할 곳은 부동이라는 바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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