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노자와의 대화 - 하이데거

* 하이데거 : 인간존재(현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은 이중적입니다. 즉 존재하면서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라는 말이죠. 하지만 존재자체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답할 수 없습니다. 존재자체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존재를 서술할 언어가 없다는 말입니다.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인식에 대한 물음입니다. 당연히 존재자체에 대한 물음일 수 없습니다. 존재란 無입니다.

* 노자 : 그대가 말하고 아는 無는 현재, 언어 속에 있는가? 언어 밖에 있는가?

* 하이데거 : 물론 그것은 최상의 언어 속에 있습니다. 언어 속 언어로써 無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는 있습니다. '無,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은 이미 無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가능한 물음입니다. 고로 無는 이미 있는 것이죠. 언어는 존재의 집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언어라는 거처에 거주합니다. 사유하는 철학자와 시인은 이 거처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언어를 통해 존재의 모습을 나타내고 언어 속에 보존하는 한에서 존재는 자기 모습을 열어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노자 : 그대는 분명 한 발짝 더 나아간 듯 하다. 하지만 無를 언어로 증명할 수는 있어도 無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가? 언어는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던가? 손가락에 매달려서야 정작 달을 볼 수 있겠는가?

* 하이데거 : 無를 경험할 수 있냐구요? 물론입니다. 왠지 모를 막연한 불안, 즉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불안은 無에 대한 일종의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큰 용기 없이는 이런 無를 내내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 중에 無를 계속 쳐다보기보다는 거의 잊고 사는 거죠. 사실 우리가 無를 잊은 것이 아니라 無가 자신의 근원성을 보이지 않게 위장할 뿐이죠. 그리고 언어가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해도 손가락을 먼저 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 노자 : 그대는 분명 두어 발짝을 더 나아간 듯 하다. 하지만 묻건대 그대가 말한 無의 경험은 動인가? 不動인가?

* 하이데거 : 그것은 動으로 파악된 不動입니다.

* 노자 : 그렇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분명 動에 속한다. 無는 不動의 자리다. 有에 대한 경험이건 無에 대한 경험이건 모든 경험은 動이다. 경험이라는 動의 不在가 바로 無이다. 그대가 아는 無는 언어 속의 無이며, 思考라는 動 속의 無이다.

* 하이데거 : 이것 보쇼, 노인장, 당신은 입만 열면 不動, 不動 하는데 도대체 당신이 不動의 자리에 있다면 뭣 하러 이렇게 動의 자리에 자꾸 나타나 動의 세상을 간섭하는거요? 또한 당신은 지금 전혀 언어를 떠나지 못하고 있잖소...당신의 不動을 動없이 전할 수 있단 말이오? 어떻게 언어를 떠나서 진리를 인식하고 느끼며 알 수 있겠소? 당신의 사유는 어디에 있소? 언어라는 動에 있소? 아니면 스스로 不動이라는 착각에 있소? 언어적 경험 없이 어떻게 존재의 본질을 얻을 수 있겠냔 말이오. 스스로 모순에 빠진 당신 자신은 보지 못한단 말이오? 당신 스스로가 動 속에 있거늘 어찌 不動을 지껄일 수 있소?

* 노자 : 그대 말이 옳다. 입을 여는 순간 나는 모순된 존재다. 그대가 내 모순을 발견한 것은 매우 훌륭하다. 이처럼 언어와 사고는 결국 논리의 길을 따라 가다가 자기 무덤을 발견한다는 것을 그대를 통해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논리는 자신의 길을 따라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스스로 그 안으로 들어간다. 다만 이것을 아는 자가 되라. 참으로 안다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때때로, 자주, 침묵보다 더 큰 설명은 없다. 不動을 말하면 不動이 아니다. 不動이 되어야 不動이다. 하지만 不動은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不動은 과정이 아니며 과정을 지나 얻는 결과가 아니다. 不動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본 바탕이다. 動의 부재가 곧 不動이다. 그대에게 不動을 말하는 것은 그대가 그대의 내면적 動, 즉 인식과 심리와 의식 및 무의식에 이르는 모든 動의 흐름을 따라 무작정 흘러가지 말라는 경고일 뿐이다. 언제나 그 중심에 있는 不動을, 말 그대로 중심 삼으라는 것뿐이다. 그대는 지금까지 반쪽 세상만 알고, 반 쪽 세상만 인정하고, 반쪽 세상만 살아왔다. 動을 따라 動의 흐름 속에서 끝없이 動으로만 흘러가고 있다. 사람에게 이 사실을 전하려 해도 언어와 사고라는 수단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하다. 사유라는 놈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하다. 이것은 마치 도둑을 잡기 위해 도둑을 고용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모든 不動地에 든 자들의 슬픔이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입을 벌릴 수도 없는 속에서, 말도 해야하고 침묵도 해야하는 것이다.

* 비트겐슈타인 : "말 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언어에는 본질이란 없습니다. 언어는 게임룰과 같은 규칙의 약속일 뿐입니다. 명료한 언어표출 외에는 침묵만이 바른 길입니다.

* 노자 : 그대 말도 옳다. 하지만 말을 하고 말고가 뭐 그리 중요한가? 나는 不動으로 말하고 不動으로 침묵할 뿐이다. 나는 모순이다. 나는 그대처럼 논리적 명료함 가운데만 머물지 않는다. 나는 질서이면서 무질서이고, 나는 당위이면서 비당위이며 논리이면서도 비논리이다. 이 모든 말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나는 스스로의 지적 만족을 위해 또는 명료함이나 안정을 위해서, 철학적 사고를 정리하고 논리적 귀결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대가 그대 속 不動의 중심으로 모든 動을 대할 수 있기를 참으로 바랄 뿐이다. 태풍의 바깥에 머물지 말고 태풍의 눈이 되기를, 不動을 되찾기를 바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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