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5일 토요일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자유로운 사람이 죽음보다도 적게 숙고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자유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다.” 에르빈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1944년)는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 명언은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 최근까지도 사람들은(철학자를 포함하여) 생명에 대해서보다는 죽음에 대해서 더욱 사색하고 고뇌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생명에 대한 관심이 지금처럼 높은 때도 없었다. 생명과학의 발달이 생명의 주제에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대중의 관심까지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과학의 제분야가 생명에 대한 통합적 연구를 할 수 있도록 기폭제가 된 것이 슈뢰딩거의 이 ‘작은 책’이다. 이 책이 분자생물학의 발달과 DNA 구조의 발견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지난 60여 년 동안 슈뢰딩거의 이론이 여러 가지 오류를 지적 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관심은 슈뢰딩거의 과학적 탐구가 남긴 철학적 물음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물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생명체도 물질로 환원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혹이 그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간도 물질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살아 있는 유기체 즉 생명체라는 공간적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 ‘시·공간상의 사건들’을 물리·화학 법칙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현재의 물리학이나 화학이 생물학적 사건들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고 해도 앞으로 이들 과학이 그 문제들을 언젠가 해명할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미생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체의 비밀을 물질을 탐구하는 방법으로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도 물질처럼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이는 자연계에서 인간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에 이르게 한다.

프로이트는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순수한 자존심에 상처를 준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찰스 다윈을 꼽았다. 다윈은 “인간의 우월한 지위를 박탈하고 인간도 동물의 후손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심리학자 제롬 브루너는 이를 다윈이 다른 생명체들과 인간 사이의 불연속을 깨고 연속선상에서 인식한 것이라고 재정의했다.

이 개념을 빌려오면, 슈뢰딩거는 유기체와 무기물을 연속선상에 놓고 탐구했다는 점에서 본격적으로 ‘근원적인 불연속’을 깨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다윈이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연속성을 밝혔다면, 슈뢰딩거는 생명체와 물질 사이의 연속성을 전제하는 탐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인간과 물질이 연속선상에 놓이게 됨으로써, 인간은 ‘특별한 존재’라는 관념(aura)을 벗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별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무시한다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슈뢰딩거의 환원론은 이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을 씀에 있어서, ‘도덕적’이라는 말에서 벗어나고 또한 그 뒤에 붙는 ‘의무’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한 것은 이를 미리 의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 이면에서 초윤리적 성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을 같은 선상에서 인식하는 태도는 사람들이 다른 생명체들을 자신만큼이나 존중할 줄 아는 계기가 되었다. 생명체와 물질의 연속적 인식은, 오만방자한 인간의 특권의식을 넘어서 다른 생명체들뿐만 아니라 하찮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 만물 모두에 대한 존중심을 싹트게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다시 역설적으로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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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네이버 책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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