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5일 토요일

실재(實在)-공(空)사상

상보적인 물리량들의 조화에 의해 기술되는 우주에서 상보적인 양 하나를 무시하고 관측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이 보는 현상계는 객관적인 실재일 수가 없다. 인간이 보는 것은 자기가 창조해서 보는 것이다.

측정전의 그 무엇을 객관적 실재라고 상상해 볼 수는 있다. 측정 전의 그 무엇은 파동으로서 파동함수로 기술된다. 그런데 파동함수는 추상적인 기호에 불과하다. 입자가 보여주는 파동성은 입자가 존재할 확률을 말해주는 확률파(確率波)다. 확률파는 실재하는 무엇이  진동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다. 확률파에는 아무런 실재도 없다. 그저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존재나 상태가 어떤 확률을 가지고 중첩되어 있을 뿐이다. 만약 파동함수가 고양이의 상태를 기술한다면 삶과 죽음을 한 몸에 중첩된 고양이를 나타낸다. 이런 고양이가 실재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파동을 기술하는 파동함수는 확률과 관계있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모든 물리적 정보가 파동함수에 들어 있다고 본다. 인간이 측정하여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파동함수가 포함하고 있는 많은 가능한 상태들 중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본다.

현대 물리학적 해석에 의하면, 인간이 보는 현상계란 이 파동함수가 그려내는 여러 가지 가능한 세계 중에서 관찰자가 하나를 골라서 보는 것이다. 현상계란 파동함수로 기술되는 “그 어떤 것”에서 상보적인 물리량들 중 어느 한 쪽을 무시하고 인간이 창조해낸 것으로서 궁극적 실재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보적인 양들을 모두 포함하는, 파동함수가 그리는 세계를 궁극적 실재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삶과 죽음 같은 온갖 상보적인 요소들이 중첩되어 있는 것을 실재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상계도 실재가 아니고 측정하기 전 파동으로 기술되는 그 무엇도 실재가 아니다. 실재라고 할 만한 것이 어디에도 없으면서도 파동함수가 물리계를 기술하며 존재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파동함수로 기술되는 그 어떤 것, 즉 존재의 근원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굳이 여기에 이름을 붙인다면 공(空)보다 더 적당한 이름은 없을 것이다. 추상적인 세계라 공이라고 불렀지만 온갖 생멸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이것을 진공묘유라고 부른다고 해서 무리는 없을 것이다.

관측행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분석행위마저 물리계에 영향을 미친다. “너”와 “나”로 나눌 수 없는 “그것”에서 “우주”와 “나”를 생각하는 순간 나타난 우주는 이미 “그것”과는 다른 우주라는 뜻이다. 여기에 대한 실험적 증거가 있으니 그것을 EPR실험이라고 한다.

양자역학은 물리학이론으로서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양자역학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아인슈타인이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제기한 EPR(Einstein, Podolsky, Rosen)가상실험(假想實驗)일 것이다. 실재성에 관한 보아의 해설을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받아드릴 수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객관적인 실재를 믿었기 때문이다. 보아는 대승기신론이나 반야심경의 지지자인 셈이고 아인슈타인은 반대자인 셈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측정 없이 물리량을 알아낼 수 있는 실험 방법을 제안하였다. 이것이 EPR실험인데 이 실험에서 제안한대로 측정 없이 입자의 물리량을 알아낼 수 있다면 이 물리량에 대응하는 물리적 실재를 인정해야 한다. 즉 객관적 실재를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EPR이 처음에 제안한 실험은 실제로 수행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제안되었으나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실험방법이 고안되었고 이 실험결과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부등식의 형태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부등식을 벨(J. S. Bell)부등식이라고 하는데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방식에 잘못이 없다면 EPR실험결과는 반드시 벨-부등식을 만족시켜야한다. EPR실험이 아니더라도 만일 벨-부등식을 위배하는 사례가 발견된다면 이는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된다. 벨 부등식을 여기서 유도하거나 수학적 형태로 제시할 수 없지만 원리는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은 지금 남과 북으로 둘로 나뉘어 살고 있다. 한반도에 사는 남자의 수는 남한에 사는 남자의 수보다 작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세 가지 독립적인 사건을 생각하고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의 크기를 구하면 어떤 부등식이 얻어진다. 이것이 벨-부등식의 내용이다. 아마도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벨-부등식을 위배하는 사례가 발견되리라고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초기 EPR의 제안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실험 방법이 제안되었는데 이들 중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질량을 제외한 모든 물리량이 ‘0’인 입자가 있다고 하자. 실제로 전자-양전자의 쌍으로 이루어진 입자가 단일 상태에 있으면 질량을 제외한 모든 물리량이 ‘0’이다. 이 전자-양전자의 쌍이 어떤 이유로 분리되어 왼쪽으로는 전자, 오른쪽으로는 양전자가 튀어나갔다고 가정하자. 전자와 양전자는 모두 스핀이라는 물리량을 갖는데 이 스핀을 측정하면 측정값은 언제나 +1/2 또는 -1/2이다. 원래 전자-양전자의 쌍이 ‘0’의 스핀 값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전자와 양전자는 어느 방향으로의 스핀 값을 측정하더라도 +1/2 또는 -1/2의 값 중 하나를 나누어 가지게 된다. 세 가지 서로 다른 방향으로의 스핀 값을 측정하여 이들을 a, b, c라 놓고, 어느 특정한 값을 가질 확률을 구해보면 양자역학적 계산은 벨 부등식을 위배하는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실험적으로도 벨 부등식을 위배하는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이렇다. 전자와 양전자가 분리된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두 입자 사이의 거리가 수백광년 쯤 떨어진 뒤 전자에 어떤 관측을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전자에 관측을 수행한다는 사실이 양전자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정보는 빛보다 빨리 전달될 수 없으므로 전자에 수행한 측정이 양전자에 영향을 미치려면 수백  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리량은 보존되므로 전자의 스핀 값을 측정한 순간 관찰자는 양전자의 스핀 값을 알 수 있게 된다. EPR의 주장은 측정하지 않고서도 양전자의 스핀 값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물리량에 대응하는 실재를 인정하여야하고 이 사실은 스핀의 방향에 상관없이 모든 방향에 대해서 성립하므로 서로 독립인 스핀의 세 방향에 대해서도 측정 없이 스핀 값의 실재를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대해 보아는 이론적인 분석행위도 인간이 자연에서 얻는 정보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반론을 제기했다. 전자-양전자의 쌍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하더라도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와 양전자로 분리되었다고 전제하고 분석을 시작한다면 분석행위 자체가 이미 정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전자-양전자의 쌍에서 전자와 양전자로 분리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측정을 하여 전자 또는 양전자로 관측했을 때만 분리되었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누구도 분리에 관해 말할 수 없고 오직 하나의 전자-양전자 쌍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분리되었다는 것을 관측하기 전에는 전체로서 하나(UNdivided Wholeness)인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보아 중에 누가 옳은가하는 실험은 1979-1982사이에 몇 번에 걸쳐 확인되었는데 보아가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전체를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전체를 "관찰대상"으로서의 자연과 "관찰자"로 나누는 것도 자연에 변형을 가한다는 것을 뜻한다. 전체는 그저 하나일 뿐인데 관측행위를 통해 창조한 것을 관찰자가 보는 것이다. 이것은 대승기신론이 말하는바 글자그대로 “三界虛僞 唯心所作”을 뒷받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분리되기 이전의 것 즉 관찰자와 관측대상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것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 남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의심하는 것 자체가 벌써 하나를 둘로 나눈 것이므로 ‘전체로서의 하나’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다. 무슨 답을 얻더라도 그것은 창조해낸 것일 뿐이다. 분리되기 이전의 것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는 허상일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그 무엇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공(空)이라고는 하겠는데 더 이상 나아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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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과학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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