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고용의 기원

여러분이 생각해본적은 별로 없겠지만 고정 월급직종이라는 제도가 생긴것은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대량생산 시대가 오기 전에는 고정임금을 받는 영구적인 일자리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일은 가정이나 소작농 혹은 가내 수공업의 헝태로 이루어졌다. 일부 장인이나 공예가들의 손을 거치기도 했다. 과거 미국 남부지역에서는 거대한 땅에 담배나 쌀, 인디고 등을 심고 수확하는 일 등이 영구적인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 즉 도제로 있던 백인이나 흑인 노예의 몫이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안정된` 수입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수입은 날씨나 전염병, 혹은 질병이나 전쟁 등에 따라 달라졌다. 그리고 당시 돈을 번다는 것은 근육과 관절에 무리가 올 정도로 무척 힘든 것이었다. 또 직장생활과 가정생활, 그리고 무급작업과 유급작업 사이의 분명한 경계선이 없었다. 여자와 아이들도 남자와 함께 일했으며 집에서 생산하는 것이 가계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미국에 대량생산이 처음 선보였을 때 누군가를 위해 영구적으로 일한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위협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19세기 중반에 한 정치 선전 문구에는 이런 귀절이 있었다. "임금은 노예를 거느리는 데에 따른 비용이나 수고, 오명에서 벗어나서 노예제도의 모든 장점을 가져보겠다는 교묘한 악의 도구다."

임금노동은 도덕적으로 경제적인 독립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발걸음 정도에서 용납되었다. 즉, 미국 북부 사람들에게 임금노동은 노예제도와는 다른 과도기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철도 노동자로 일하다가 법을 공부하고 생계를 직접 꾸려나간 링컨은 자신의 사례를 제시했다. "남부사람들은 북부의 자유인보다 남부의 노예가 훨씬 더 잘산다고 주장하는데, 북부의 노동자에 대해 정말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노동자 계급이란 없다. 작년에는 다른사람을 위해 일했지만 올해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고 내년에는 자신을 위해 일해줄 사람을 고용할 것이다." 라고 노예 제도를 방어하고 나섰던 남부 사람들을 비웃기도 했다.

뉴잉글랜드와 대서양 연안을 중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소규모 공장의 소유주들은 능력있는 기술자와 직접 계얄을 맺고 생산량에 따라 임금을 지불했다. 제조업과 관련된 일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기술자들은 이런 관계속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라나 남북전쟁후 대량생산의 시대가 열리면서 공장주들은 기술자들을 기계로 대체했고 대신 이민자를 비숙련공으로 고용해 고정월급을 주고 기계를 돌리도록 했다. 이에 대해 기술자들은 미국 최초의 대규모 노조인 `노동기사단(the Knight of Labor)`을 결성해 `임금제도 폐지`라는 목표로 대응에 나섰다.

최초의 대규모 충돌은 1892년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의 철강공장에서 발생했다. 대치상황은 몇달째 계속되었으며 비노조원이 펜실베니아 주정부군의 보호속에 공장에 난입, 노조가 손을 들면서 막을 내렸다. 그 이후로 몇년 동안 기업의 지원을 받은 주,연방정부는 소유주 쪽의 입장을 대변해주었다. 1894년 철도노조원들이 비인간적 처우에 항의하며 파업하여 교통대란이 생기자 연방법원은 파업금지를 명했고 클리블런드 대통령은 파업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군대를 파견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결국 노동 기사단이 패배로 끝나면서 임금노동이 하나의 표준이 되었다. 이후 결성된 노조들은 이금제도의 필연성을 받아들였다.

'''''''''''''''''''''''''''''''''''''''''''''''''''''''''''''''''
The Future Of success 112p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