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야심과 갈등, 충돌

크리슈나무르티 : 사람들은 전쟁과 유례없는 참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과연 야심은 진보일까요? 왜 우리는 야심을 가질까요? 왜 성공하기를, 더 우월해지기를 바랄까요? 왜 사람들은 특정 이념이나 국가, 종교를 통해서 자신을 확인하려고 야단들일까요? 바로 이러한 자기주장이 갈등과 혼란의 주요 원인이 아닐까요? 야심이 없으면 우리는 정말 생존할 수 없는 것일까요?

질문자 : 세상에 어떤 사람이 성공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 채, 존중받지 못한 채 살고 싶어하겠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성공과 박수갈채를 얻고 싶은 이 욕망이 안팎으로 갈등을 가져오지 않을까요? 야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쇠퇴를 의미할까요? 갈등을 갖지 않는 것이 침체일까요? 우리는 신앙이나 교리로써 우리를 마취시키고 잠재워, 깊은 갈등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어떤 활동은 마취제입니다. 그런 상태야말로 쇠퇴와 썩어가는 징조임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거짓된 것을 거짓되다고 솔직히 인정할 때, 그것이 죽음을 가져옵니까? 행복에 대한 것이든, 신, 또는 성공에 대한 것이든, 어떤 형태로든 야심이 내적, 외적 갈등의 시작임을 의식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종말, 삶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질문자 : 저는 야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뭔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지루해집니다.

크리슈나무르티 : 어째서 우리는 영리하고 야심적일까요? 야심이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회피하려는 충동이 아닐까요? 이 영리함은 실제로는 어리석은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두려워할까요?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고 소용이 있는 것인가요? 도피에 성공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은 여전히 남아서, 갈등과 고통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갈등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부정하는 것, 또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직면하지 않기 때문에 갈등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해결할 수 없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는 복잡성이 없고 단순하나 우리가 찾는 수많은 도피 속에는 복잡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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