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5일 토요일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odinger's Cat)

양자역학의 근본인 파동 방정식을 확립한 슈뢰딩거(Schrodinger)는 자신의 파동 방정식을 지키는 과정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제안했다.

밀폐된 상자 속에 폭약이 있고 이 위에 고양이가 앉아 있다. 입자의 빔을 아주 약하게 하여 입자 빔이 두 경로를 1/2의 확률로 선택하도록 만들어준다. 만약 1번 경로로 통과하게 되면 스위치가 접속되어 폭약이 터지면서 고양이는 죽는다. 만약 2번 경로를 통과하게 되면 스위치가 열리게 되어 폭약은 터지지 않게 되고 고양이는 살게 된다. 상자 밖에 있으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하는 관찰자는 최소한 한 입자가 1번이나 2번 경로를 분명히 지난 뒤에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관찰자는 고양이는 삶의 상태와 죽음의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고양이는 반은 죽었고 반은 살아 있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관찰자가 내부를 들여다보는 순간, 즉 측정을 하는 순간 고양이의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 삶과 죽음은, 입자·파동의 이중성처럼 현상계에선 양립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상자를 열면, 관찰자는 '죽은 고양이', '산 고양이' 둘 중의 하나밖에 보지 못한다. 관찰하는 바로 그 순간 고양이는 살아있는 상태로 나타나거나 죽은 상태로 나타난다. 삶과 죽음은 관찰하는 사람이 창조한 것이다.

즉, 고양이의 삶과 죽음이 관찰자의 행동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이런 일이 실제 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가?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은 관찰자의 측정 행위와 실제와의 관계에 대해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사고실험에 대한 해석>

1. 상식적(뉴턴적) 견해
고양이는 죽었든지 아니면 살아 있든지 둘 중 하나이며 우리가 상자 안을 들여다 보는지에 관계없이 고양이는 어떤 상태로 있다. 관측자와 고양이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각각 독립적인 실체이다.

2. 양자적(상보적) 견해
알파입자가 나와 있는 것과 나와 있지 않은 것의 두가지 상태를 아울러 가지고있다. 따라서 상자 안에 들어있는 계는 두 상태의 중첩으로 존재하는데, 두 상태 중 하나는 산 고양이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고양이이다. 즉 1시간 후 고양이는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는 황당한 결과가 된다. 무엇이 고양이의 운명을 좌우하는가? 양자역학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상자를 손수 열어서 죽어있는 고양이를 발견했다면 바로 당신이 고양이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다.


☞ 수많은 결화해석의 결과 우리는 마침내 숨은 변수를 찾아냈다. : 그것은 바로「우리자신」이었다.

상자를 열기 전에는,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어, '죽었다'고 해도 틀리고, '살았다'고 해도 틀린다. 이 확률 방정식의 답에 해당하는 현상은 자연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이다.
이것을 물리학에서는 사람이 "죽은 고양이를 창조해서 본다"고 하거나, "산 고양이를 창조해서 본다"고 해석한다. 사람이 사람의 뜻대로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50:50의 가능성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서 그것만을 보고 자기가 본 것만이 전체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자 속에 고양이를 넣어두고 이 고양이가 죽었느냐 살았느냐를 따지거나, 상자를 열어서 관찰하면 반드시 죽은 고양이를 보거나 산 고양이를 보게 될 뿐,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고양이를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바로 이러한 생·사, 선·악, 호·오의 이분법적 세계이다. 이렇게 사물을 분별하고 뷴류하여 아는 지혜를 분별지라 한다. 그렇다면 창조하기 이전(또는 선택하기 이전)의 상자는 무엇인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또는 이것도 가능성이 있고, 저것도 역시 가능성이 있다.

양자역학에서 파동은 관찰자가 입자를 발견할 확률로 파악하여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은 그렇게 특별히 신비스러운 것은 아니다. 전자와 빛의 움직임을 보면,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입자", "파동"이라는 개념들이 '적용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자(eletron)는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다. 어떤 실험을 하는가에 따라 전자는 입자로 보일 수도 있고, 파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입자인가, 파동인가"의 문제는 자연의 법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하나의 자연현상에 대해 상보적인 양 두가지를 함께 관측할 수 없다는 것이, 보어가 제시한 상보성 원리이다. 상보적인 양은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는 양이기 때문에 이원론적 세계에 사는 우리의 인지능력으로는 두가지 모두가 파악되지 않는다. 적어도 오관으로 관측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인간의 분별지(分別智)로써는 그렇다.

따라서 두가지 양 모두에 적당한 불확정성(不確定性)을 두고 관측하거나 어느 한가지 양을 철저히 무시하고 나머지 한가지 양만을 확실하게 관측할 수 밖에 없다. 어느 것을 어떻게 관측하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관측자의 선택에 맡겨진 것이며 관측자가 선택하여 자연을 본다고 해도 자기가 보고싶은 것을 창조하여 본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관측한 것을 다른 사람이 관측하였더라면 다른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 식으로 창조했기 때문이다.

양자론에 따르면 물질은 방사선을 방출한다고 하는 상태와 방출하지 않는다고 하는 상태는 반반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중적 중첩상태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양이는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가 반반이라고 하게 되어버린다. 한마리의 고양이의 상태를 양자역학에 입각해서 충실히 기술하면 삶이 2분의 1이고, 죽음이 2분의 1인 셈이 된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과연 이 이중성의 모순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역설'이라고 일컬어지는 문제이다. 상식적으로 볼때 고양이는 틀림없이 죽지 않았다면 살아있을 것이다. 고양이가 살아있을 확률과 죽어있을 확률이 각각 2분의 1이라면 고양이는 살았다고도 죽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상태를 우리가 관찰하게 되면, 그 여러가지 가능 상태 중 하나가 현실화 된다는 것이다.

먼저 고양이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의지하고 상자를 열면 고양이는 살아있고, 또한 죽었을 것이라고 의지하고 상자를 열었을 경우에는 고양이는 죽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주관의 선택 의지에 따라서 고양이가 살았거나 죽었거나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는 파동함수가 붕괴되었다고 그리고 그 상태가 하나의 고유치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물론 전자와 같은 미시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자연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우리 인간의 주관의 개입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입자와 인식 주관간의 기묘한 관계는 입자의 스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중성미자(中性微子) 뉴트리노나 전자와 같은 입자는 일종의 내부 회전, 즉 스핀을 갖고 있는 데(물론 모든 소립자들은 스핀을 갖고 있다) 실험자가 입자의 스핀방향을 알기 위해서 실험 장치를 만들고 그 좌표가 될 특정 방향을 취하였을 경우(이때 기준이 되는 방향은 전장 또는 자장에 의하여 정의될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스핀이 장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입자의 스핀은 실험자가 선정한 기준방향을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입자는 실험자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언제나 실험자가 자유롭게 선정한 기준방향으로 스핀의 회전방향이 바뀌어 마치 실험자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미시적인 소립자의 세계는 이처럼 기묘한 주관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사람이 무언중에 다른 사람과 직관적으로 공감을 느끼는 순간을 불교에서는 '염화미소'니 '이심전심'이니 하는데, 그 경우와 일맥상통한다. 단지 양자역학의 특징은 전자와 같은 물질입자가 마치 정신이 있는 양 인간의 정신과 교감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다. 물론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데이비스와 브라운은 관측행위가 양자물리학에서 불가피하게 행하는 중요한 역할은 정신 및 의식의 본질과 물질과 정신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유발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단 어떤 양자계를 관측하게 되면, 양자계의 상태, 즉 파동함수가 급격히 변한다는 사실은 마치 '물질도처에 정신이 존재한다(mind over matter)'는 생각과 매우 흡사하다. 이것은 불교의 [一切衆生皆有佛性]을 연상케한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물리적인 상태는 정신적인 상태를 변화시키도록 행동하고, 정신적인 상 태는 물리적인 상태에 다시 영향을 준다. 폰 노이만은 아무것도 파동함수의 '붕괴'를 일으킬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의식이 있는 개인이 관여할 때에만 비로소 연결되어 있는 사슬이 종말을 맞게 된다. 측정 결과가 어떤 개인의 의식에 들어갈 때에만 비로소 양자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의 피라미드 구조가 이해할 수 있는 뚜렷한 실재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라는 물리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정신은 측정의 성격을 결정짓는 양자 상태의 급격하고 비가역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이러한 의식과 물질과의 상관관계의 설명은 데이비스와 부라운이 말한 것처럼 분명히 동양의 종교적 사유형태와 일치되는 면이 있다. 그런데 禪佛敎에서는 문자로서는 알 수 없으며(不立文字), 모든 경전 밖의 방법으로 전달되는 비전이 있다(敎外別傳)고 말한다.

즉, 이는 '법'이라든가 실재(實在) 또는 진리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 가능할 뿐이고 경전(經典)들이란 다만 우리 자신의 진정한 통찰 ― 자오(自 悟)를 자극하고 환기시키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든 외적 사물은 우리들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의 반사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외적 교리는 우리들 자성의 음악적 메아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자신을 단순한 반사 혹은 메아리와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 자기가 자신의 자성을 봄으로써만 정말 자신을 본질적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선불교의 비전은 잘 알려진 붓다와 가섭존자와의 관계에서 잘 표현된다. 가섭존자는 인도 禪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본래 인도의 Dayana(禪那)는 일종의 집중적인 명상을 나타내는데 대해서 중국의 禪은 참선을 통해 일거에 깨닫는 돈오(頓悟)나 직관지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禪의 가장 고유한 특징은 내심자증(內心自證) 하는 데 있다고 선사들은 말한다. 부처님이 침묵 속에 청중 앞에 꽃 한송이를 내보였을 때 가섭존자만이 이 한송이 꽃 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른바 염화미소라 하는 것이다.

스즈께 다이세쯔의 설명에 의하면, 禪의 방법은 대상 그 자체로 바로 들어가서, 그 내부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는 것이다. 어떤 꽃을 안다는 것은 그 꽃이 되어 그 꽃으로 있는 것이 고, 그 꽃과 같이 피는 것이며, 꽃과 같이 비를 맞고 햇빛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꽃은 나 에게 대화를 해오며, 나는 모든 꽃의 일체의 신비와 기쁨과 괴로움 등을 알게 된다. 이것은 꽃 속에서 맥박치는 꽃의 생명 전체를 아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꽃을 알게 된 나의 '깨달음'에 의해서 나는 전우주의 신비를 알게 되며, 이 우주의 신비를 알게 됨으로써 실로 나 자신의 온갖 신비를 알게 된다. 여기서는 주객 분리의 나와 우주는 이미 해체된 것이다. 아니 나와 우주는 하나가 된 것이다. 하나 속의 둘이고 둘 속의 하나이다.

바로 여기서 禪은 量子論과 만나게 된다. 말하자면 量子論의 과학은 禪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量子論은 과학의 새로운 인식방법이지만 禪의 頓悟 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간접적으로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禪불교에서 '불립문자'란 다만 문자에 집착이 없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경전이나 문자가 진리를 가르치는 방편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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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와 불교, 9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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