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5일 토요일

자기혐오의 효용

자기혐오라고 하는 이상, 자기를 혐오하는 자기와 자기에 의해 혐오되는 자기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혐오되는 것은 항상 '현실적으로' 자기가 실행한 어떤 행위다.

그들의 행위를 고찰해 보면, 항상 자기의 어떤 욕구를 만족케 했든가 만족시킬 가능성이 있었던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을 상대로 뻔뻔스럽게 집적거린 것은 혹시 승낙을 얻어내면 단물을 켤 수 있기 때문이다. 비겁하고 미련스러운 짓을 저지르게 되는 것은, 어떤 이익 또는 쾌락을 얻을 정정당당한 수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체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선 '천덕스럽다'느니, '얼토당토않다'고 판단할지언정, 그것을 입에 담거나 자랑하는 시점에서는 신나는 기분이었다.

'혐오되는 자기'란 틀림없이 현실의 자기인 것이다. 그에 반해 '혐오하는 자기'에는 어디를 찾아보아도 현실적 기반이 발견되지 않는다. 술을 마시고 후회하여 금주를 맹세하고도 또 술을 마셔대는 알코올 중독자와 같이, 자기혐오의 경우도 그토록 격렬하게 자기를 혐오하면서도 같은 상황이 되면 또 그같은 행위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본래 같으면, 혐오는 혐오 대상을 배제하거나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힘이 없다고 한다면, 자기혐오의 경우 혐오는 과연 진정한 혐오인가? 하고 의심스러워진다.

자기혐오란 필경 '가공의 자기'가 '현실의 자기'를 혐오하고 있는 상태다. '가공의 자기'란 요컨대는, 상스러운 허튼 소리를 지껄이지 않는 자기, 비겁하고 미련스런 짓을 저지르지 않는 자기다. 바꾸어 말하면, 남이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자기,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자기다.

즉, '가공의 자기'란 사회적 승인과 자존심으로 지탱되고 있다. '가공의 자기'같은 것은 없는 편이 '현실의 자기'의 욕구를 자유롭게 만족시킬 수 있어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랬다가는 사회적 승인을 잃고 자존심이 상처를 입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고찰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컨대, 무능한 사람이 자기를 유능하다고 생각하고 싶을 때, 또는 비열한 놈이 자신을 도덕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경우, 그 낙차를 얼버무리는 데 뒷받침이 되는 것이 자기혐오다. 이에 자기혐오의 용도가 명백해진다.

아주 지겨운 욕망을 가졌을 때, 당사자는 양자 택일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 지겨운 짓은 안하겠다는 고급 수준의 사회적 승인과 자존심을 단념하고 욕망의 만족을 얻는 경우와, 그와 반대로 그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단념하고 고급수준의 사회적 승인과 자존심을 유지하는 경우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이 같은 양자택일에 직면하여 어느 쪽도 단념하고 싶지 않다. 이럴때 '뽕도 따고 임도 보고 싶다'는 욕심쟁이가 쓰는 속임수의 하나가 자기혐오다. 그는 현실의 차원에서 그 욕망을 만족시키고, 그 만족을 맛본 자기를 비자기화한다. 솔직, 자유롭지도 못한 주제에 자신이 숭고한척하면서 자기위안을 얻는다.

이는 일종의 면죄부다. 자기혐오는 혐오된 행위의 재발을 저지하기는 커녕 면죄부를 통해 촉진한다. 어떤 '결점' 또는 '나쁜 버릇' 등에 관해 당사자가 자기혐오를 가지고 있는 한, 그 결점 또는 나쁜 버릇은 낫지 않는다고 보아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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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혐오의 효용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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