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가슴 큰 여배우, 마라톤, 폭탄주, 성매매, 독수리 오형제의 공통점

가슴 큰 여배우에 대한 열광

배 나오고 탈모로 고민하는 내 주위의 중년 남자들은 대부분 김혜수를 좋아한다. 그녀의 엄청난 가슴 때문이다. 그 가슴을 보면 철없는 중년들은 한결같이 정신이 혼미해진다. 영화제 시상식이나 시사회가 있는 날의 뉴스에는 어김없이 그녀들의 가슴을 볼 수 있다. 이들이 가슴을 드러내는 이유는 이 가슴을 훔쳐보는 철없는 이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왜 남자들은 큰 가슴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미국식 포르노그래피에 길들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미국식 포르노그래피는 큰 가슴 외에도 정말 많은 것을 보여준다. 성기, 채찍, 가죽장화…. 그러나 이 땅의 사내들은 그중에서 유독 큰 가슴에만 집착한다.

현상의 배후에는 심층심리학적 욕구가 숨겨져 있다. 사는 게 재미없는 남자들의 첫 번째 현상, 즉 ‘큰 가슴으로의 퇴행’이다. 그것은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살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리 둘러봐도 없다. 게다가 세상은 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무기력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의사소통의 문제다. 진정한 의사소통 행위는 정서공유가 전제돼야 한다. 그러나 서로 정서를 공유하는 과정이 박탈된 논리적 의사소통 행위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로 인한 불안 때문에 한국 남자들은 큰 가슴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 큰 가슴에 머리를 깊이 처박고 울고 싶은 것이다.

인간이 가장 완벽한 소통을 경험하는 곳은 어머니의 가슴에서다. 어머니의 젖을 빨 때, 아기는 자신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해주는 또 다른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똑같이 느끼는 또 다른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의사소통행위는 시작된다. 이를 철학적인 개념으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고 한다. 어머니와 피부를 맞대고 정서를 교환하는 행위로부터 인간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세상과 내가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신념은 어머니의 가슴에서 시작된다. 소통이 어려워질수록 인간은 불안해진다. 이 불안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지극히 원초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어머니의 가슴에서 완벽했던 정서의 소통 경험에 대한 기억이 큰 가슴에 대한 열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마라톤에 대한 열광

소통부재의 불안에 시달리며 재미라고는 전혀 없는 삶에 지친 한국의 중년들에게 나타나는 또다른 이상현상은 마라톤이다. 몇 년 전부터 마라톤 대회가 열리면 사람들로 미어진다. 대부분 40, 50대 중년들이다. 대개 건강을 위해 뛴다고 한다. 그러나 왜 하필 마라톤인가? 마라톤 대회를 개최하면 절대 적자 나는 법이 없다고 한다. 전국에서 고통을 사서 겪겠다는 사내들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이들의 마라톤 완주 횟수는 1년에 10~20회에 육박한다. 그러나 이봉주 선수와 같은 전문 마라토너의 1년간 완주 횟수는 3~5회에 불과하다고 한다. 한 번의 마라톤 완주는 엄청난 체력 소진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물론 건강을 위해 달리는 이도 많다. 내가 궁금한 것은 ‘느닷없는’ 마라톤 열풍이다. 건강을 위해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셀 수 없이 많은데, 왜 하필 그 재미없고 고통스러운 마라톤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과 더는 소통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이 택하는 가장 쉬운 존재 확인 방식은 자학이다. 사회적 관계와 소통을 통해선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고통을 통해 느끼고 싶은 것이다. 마라톤 대회에서 완주한 이들의 인터뷰에서 한결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뛰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싸워서 이겨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과 소통하는 행위를 철학에서는 자기반성(self-reflection)이라 한다. 그러나 이 땅의 사내들은 자신과 마주하며 이야기하기보다는 자신과 싸워 이기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내 진정한 존재가 회복될 수는 없다. 소통행위의 부재로 야기된 불안은 소통의 회복으로만 해소되기 때문이다.

왜 죽도록 마시는가?

‘폭탄주’, 혹은 ‘과음’ 현상은 정말 심각하다. 마라톤은 그래도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진지한 노력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폭탄주는 아주 악질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해결책이 나온다. 하지만 폭탄주는 문제로부터 도피하려는 아주 심각한 퇴행적 현상이다.

왜 폭탄주를 마시느냐고 물었다. 빨리 취한다고 했다. 나는 또 물었다. 왜 빨리 취하려고 하느냐. 친구들은 맨정신으로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며 이야기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폭탄주가 몇 잔 돌아가고 눈이 흐릿해지면 그때서야 비로소 맘을 터놓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증상을 정신병리학에서는 자폐증이라고 한다. 폭탄주 문화는 집단 자폐증이다. 자폐증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아동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자폐현상은 나타난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음에도 그 사람의 구체적 신상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경우가 가끔 있다. 절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 내면의 세계가 타인과 공유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런 경우도 약한 정도의 자폐증상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종류의 자폐환자들이 공유하는 증상이 있다. 상대의 눈을 절대 마주치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이 드러날까 두려운 까닭이다. 술을 마시지 말란 이야기가 아니다. 제대로 마시란 이야기다. 술이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세계관을 공유하거나, 지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정서를 공유하려고 마시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 정서를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두려워 빨리 취하려고 마시는 술자리가 어찌 정상이라 할 수 있을까.

성매매를 근절시키지 못하는 까닭

스포츠마사지, 각종 스파시설로부터 안마시술소, 퇴폐이발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피부를 자극하는 서비스산업이 한국에선느 엄청난 호황이다. 동네마다 다 있는 운동장만한 찜질방도 크게는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나는 이를 ‘피부자극결핍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의사소통 장애로 야기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지는 행위는 상호작용의 가장 기본적 형태다. 우리가 남의 몸을 손으로 만질 때 우리의 손은 상대방의 몸에 의해 ‘만져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껴안는다. 만지고, 또 만져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무도 나를 만져주지 않는다.

금실 좋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살다가 할아버지가 먼저 죽으면 할머니는 평균 4년 정도 더 산다고 한다. 그러나 할머니가 먼저 죽으면 할아버지는 6개월 이내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스킨십’의 차이 때문이라고 일본 심리학자 야마구치 하지메는 주장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없어도 스킨십의 대상이 있다. 손자들을 만지고, 며느리를 만진다. 그뿐만 아니라 바느질, 요리 등을 통해 끊임없이 피부를 자극한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할머니가 사라지면 도무지 만질 대상이 없다. 결국 깊은 소외감에 시달리다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모든 포유류는 피부접촉을 통한 정서적 안정을 본능적으로 추구하게 돼 있다. 스킨십이 박탈된 상태에서 자란 원숭이는 면역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불안증세를 보이다 일찍 죽는다. 새끼 쥐를 둘로 나누어 한 집단에는 물을 묻힌 붓으로 피부를 계속 자극하고 다른 집단에겐 그저 먹을 것만 줬다. 물 묻힌 붓은 어미 쥐가 혀로 핥아주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보였다. 먹을 것만 제공받은 쥐는 불과 몇 주를 못 버티고 죽은 반면, 붓으로 계속 자극해준 쥐는 건강하게 살아남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간호사들이 지속적으로 터치를 해주는 중환자실 환자의 생존율이 그렇지 않은 중환자실 환자의 생존율보다 훨씬 높았다고 한다.

만지고 만져지는 스킨십을 통한 의사소통 과정이 박탈당하면서 에로티시즘의 왜곡이 나타났다고 영국의 사회학자 기든스는 주장한다.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상호관계성이 성기에만 집중되어 나타나는 왜곡된 남근중심주의적 포르노물의 범람이 그 예다. 한국의 안마시술소, 퇴폐이발소는 이러한 이론적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단순한 변태 성매매가 아니다. 건강한 일상의 재미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러운 정서적 교류가 박탈된 한국 남자들의 의사소통장애가 범람하는 안마시술소, 퇴폐이발소의 진짜 원인인 것이다. 이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국의 각종 변태영업은 성매매금지법 따위로는 절대 해결할 수도, 해결될 수도 없는 일이다.

사회적으로 건전하다고 여겨지는 스포츠마사지, 스파, 안마와 같은 서비스 시설 또한 이러한 근원적인 소통부재의 불안을 치유하기 위해 나타난 자본주의적 해결책이다. 21세기에 나타난 대부분의 웰빙산업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정말 블루오션이 아닐 수 없다. 만지고 만져질수록 자신과 상대방의 존재는 커진다. 상호작용적 존재감이 커진다는 이야기다.

지구는 우리가 지킨다

한국 남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술 한잔 마시면 지구를 지킨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국내의 모든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될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운다. 주가를 비롯한 경제 문제,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그 어느 전문가보다 확실한 진단과 대안을 내놓는다. 어디 국내 문제뿐인가. 독도 문제나 이라크 파병과 같은 외교 문제, 심지어는 미국 대통령선거나 지구온난화 문제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지구방위대가 되어 온갖 우주의 침략자와 싸우는 데 그렇게 용감할 수가 없다.

일상에서 끊임없이 확인돼야 할 재미와 놀이를 통한 정서공유, 의사소통을 통한 존재확인의 과정이 생략된 이들에게는 오직 지구를 지키는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를 나는 다섯 번째 현상, 즉 ‘독수리5형제 증후군’이라 정의한다.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5형제. 그런데 문제는 이 용감한 지구방위대가 정작 자신의 행복을 챙기라고 하면 하염없이 비겁해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일주일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주말에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갑자기 맛있는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우아한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가 스테이크와 레드와인을 시켜 혼자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혼자서?! 그런데 어렵다. 허름한 순대국밥집에 혼자 들어가 배를 채우는 일은 할 수 있어도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혼자 즐기는 일은 대부분 힘들어한다. 왜 그럴까. 남이 나를 사회부적응자로 볼까 두려운 까닭이다.

음악회나 영화관은 혼자 갈 수 있는가. 그것 역시 쉽지 않다. 정말 좋은 음악은 혼자 들어야 한다. 혼자 들어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혼자 음악회에 앉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컴컴한 영화관에 혼자 앉아 있는 것조차 쑥스러운 사람이 대부분이다. 왜일까. 이 또한 남 눈이 두려운 까닭이다.

내가 혼자 와서 음악 듣는 것, 혼자 스테이크 먹는 것에 대해 그 어떤 이도 관심 갖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존재하지도 않는 눈길이 두려워 혼자 맛있는 스테이크를 즐기는 일, 음악회와 영화관에 가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리고 술집에 앉아 혼신을 다해 지구를 지킨다. 이게 정상인가. 절대 아니다. 그래서 독수리5형제 ‘증후군’인 것이다.

사는 게 재미없는 이들은 세상이 뒤집히길 원한다. 2002년 월드컵처럼 온 국민이 나와 빨간 옷 입고 세상이 뒤집히는 축제만 재미있다고 느낀다. 평소 삶이 재미없으니 클럽을 찾아 신나게 흔들고 귀청이 떨어질 것같은 라이브 콘서트에서 소리지르고 실신한다. 그리고는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말한다. 엄청난 재미에 대한 환상이다.


- 김정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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